붉은 수선화.
밖에는 진눈깨비가 얼마나 세차게 내리는지 얼굴에 맞으면 그대로 얼어버릴 정도로 얼얼했다.

사무실을 나설 때보다 바람은 더 거세게 불었다. 진눈깨비가 뺨에 닿자 그 자리가 마치 칼로 저며 내는 것처럼 아팠다.

지금 생각하니 누군가가 장난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대로 가보기로 했다.

‘뭐, 밑져야 본전인데….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까 양심 있는 녀석이면 나오겠지 뭐.’

혼자 중얼거리면서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흔하게 있었다.

비자금이나 돈세탁 같은 정보가 들어 있는 극비자료를 건네줄 때에는 흔히 이런 방법이 사용되었다.

저녁 7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거리에서 카키색 반코트를 걸친 중년 남자가 손목시계를 힐끔힐끔 들여다보면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한 듯 주위를 두리두리 살피고 있었다.

퇴근시간이라 평소 같았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텐데, 진눈깨비에 바람마저 세게 부니까 사람들은 일찌감치 집으로 발길을 돌렸는지 초저녁에 인적이 끊겼다.

그는 초조해서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약속장소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가 맞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시 그 사람이 보내온 문자를 몇 번이고 쳐다보면서 위치를 찾았다.

진눈깨비가 살짝 깔린 길은 무척 미끄러웠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이 스스로의 눈에도 불안하게 보였다. 그때 아파 발을 헛디뎌 미끈둥하면서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바짓가랑이가 젖어버렸다.

기분이 영 엉망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모든 게 다 좋을 수만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약간 어두침침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거기는 바로 코앞의 사람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위가 음침했다. 그 골목은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찬바람만 터널처럼 불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20여분도 더 지났건만 인기척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도대체 누군데 이 시간에 나보고 이런 곳으로 나오라고 하는 건지 궁금증만 더해 가고 있었다.

혼잣말로 우물거리면서 뒤돌아서자 한 왜소한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그 사람을 쳐다보자 그 사나이도 순간 얼어붙는 척처럼 보였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귀신에 홀린 건 아닌가 하면서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었다.

“혹시 김한철을 만나러 오신 분 아닙니까? 아니면 이 자리에 올 사람이 없는데요.”

그 사내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더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면서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사내는 왼손을 밑으로 내리더니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 사내의 오른손에는 좀 묵직하게 보이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사내가 하라는 대로 바짝 다가가 서자 귓속말로 신분을 확인하려고 몇 가지를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당신 이름은?”

“예, 저는 김한철입니다.”

“전화번호를 말해 보세요.”

“011-345-××××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을 대보세요.”

“김자, 형자, 호자입니다.”

신분 확인을 마치더니 그 땅딸막한 사내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김한철에게 넘겨주고는 말 한 마디 없이 종종걸음으로 골목길로 빨려 들어갔다.

얼떨결에 괘 무거운 가방을 넘겨받고 움직이려니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화면을 얼핏 쳐다봤더니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가방 안에 있는 문건을 읽어보고 48시간 안에 승낙서를 작성하여 보낼 것.”

밤이 깊어가면서 바람은 점점 더 세게 부는데 옷을 허술하게 입고 왔더니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감기증세가 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설레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날이 오는 것인가.

택시 안에서 그는 곯아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저자 최도영(崔道榮)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MBC에 입사해서 라디오에서만 근무했다.

‘환경리포트’ ‘마이크출동’ ‘여성시대’ ‘음악캠프’ ‘푸른신호등’ 등 주로 현장에 나가서 취재하는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1988년 이후 현재까지 환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2007년에 공정방송노조를 설립했으며 사무국장, 대외협력국장을 지냈으며 2009년에는 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2월, 노조원 대상의 ‘MBC 민영화 여론조사’, 그해 5월 ‘일산제작센터 비리의혹’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때 불과 3일 사이에 노조원의 3분의 2가 빠져나갔다. 현재는 이 사회의 썩은 사과를 골라내는 ‘뉴스톰’ ‘엔터스톰’ ‘팩트스톰’ ‘블랙박스’ 등을 준비하고 있다.

▶경력
라디오본부 PD(국장), MBC공정방송노동조합 사무국장 겸 대외협력국장 등.

▶담당프로그램 
환경리포트, 여성시대, 마이크출동, 배철수의 음악캠프, FM모닝쇼, 푸른신호등 아침의 행진, 강변가요제, 대학가곡제, 신인가요제, 한국민요대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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