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대선후보 검증1 - 박근혜 편

<뉴스포스트=허주렬 기자>19대 총선이 끝나고 정치권의 관심은 12월 대선으로 쏠리고 있다. 이미 여야의 대권잠룡들은 속속들이 자신들만의 대권행보를 시작했다. 대선은 향후 5년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이기 때문에 그 어떤 선거보다도 중요성이 크다. 이에 대선이 6개월여 남은 시점에서 국가의 5년을 좌우할 대통령 후보들의 면면을 <뉴스포스트>에서 낱낱이 파헤쳐볼 예정이다. 첫 번째 인물은 수년간 지지율 1위를 달려왔으며, 현 시점에서 미래권력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그의 삶과 정치,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경쟁력을 진단해봤다. 

지난달 30일 미국은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 공화당의 미트 롬니로 대선 대진표가 결정됐다. 미국 대선은 한국 보다 한 달여 빠른 11월 6일 실시된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하면 늦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만큼 오랜 기간 미국 대선주자들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혹독한 검증을 거친다. 이에 비하면 아직 우리는 각 당의 후보가 결정되지도, 심지어 유력 대선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출사표를 던지지 않은 후보가 대부분이다. 5년 전에도 그랬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8월 말, 민주당 정동영 후보는 10월 중순에 후보로 결정됐다. 검증의 시간이 부족했고, 결국 임기 말 이명박 대통령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측근 비리와 부패, 민주주의·서민경제의 후퇴라는 비판에 시름을 앓고 있다. 대통령 후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의 필요성은 역사가 보여준다.

인간 박근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현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2007년 대선 이후부터 그랬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전후해 ‘안철수 열풍’이 불며, 잠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대세론’을 위협받았지만 4·11 총선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1순위 대통령 후보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선거의 여왕’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비운의 여인’ ‘국가와 결혼한 여인’ 등 단편적인 모습의 박 전 위원장 외에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인간 박근혜’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박 전 위원장은 1952년 2일 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에서 당시 육군 정보학교장으로 근무하던 박정희 대령과 육영수 씨 사이의 첫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아래로 여동생 박근령 씨와 남동생 박지만 씨, 그리고 이복언니인 박재옥 씨가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의 결혼에 앞서 본처 김호남 씨와의 사이에서 박재옥 씨를 낳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의 큰딸이 박 전 위원장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박 전 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이다.

박 전 위원장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장충초→성심여중→성심여고→서강대를 졸업했으며, 대학졸업 직후인 1974년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그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들은 박 전 위원장은 급히 귀국했고,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1979년까지 6년가량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했다.

1979년 10월 26일 이번에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자신의 오른팔로 불리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총탄에 사망하자 그는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 후 1998년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18년간 육영재단(1982년), 정수장학회(1994년)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업적기리기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진다.

문제는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은 박 전 대통령이 독재집권기에 강탈한 ‘장물’로 해당 기구에 박 전 대통령이나 박 전 위원장은 한 푼도 출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으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재직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야권에서는 “유신의 잔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별다른 경제활동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형제자매와 관련해 동생 박지만 씨는 2002년까지 수차례 사창가와 여관 등에서 윤락녀와 어울리며 상습적인 마약 투약을 했고, 지난해에는 삼화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해 연루 의혹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과 박지만 씨는 친구사이이며, 지만 씨의 부인 서향희 변호사는 삼화저축은행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삼화저축은행 사건과 관련해 박 전 위원장은 당시 “본인(지만 씨)이 (신 명예회장과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밝혔으면 그걸로 다 끝난 것 아니냐”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박 전 위원장과 여동생 근령 씨는 육영재단을 둘러싼 다툼이 일기도 했고, 현재 근령 씨의 남편 신동욱 씨는 결국 박 전 위원장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수감중이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속 서예 학습 중인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바라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1977.8.31).
정치인 박근혜

‘정치인 박근혜’의 본격적인 등장은 1997년 12월 10일 이뤄졌다. 당시 IMF 위기가 대한민국을 강타한 시점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경북 구미지구당에 입당계를 제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의 지지유세를 함께 했으며 이듬해 4월에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출마의 변으로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의 애국 충정과 못 다한 유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낙후된 대구 경북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을 종종 했다. “부강하고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시다 비운에 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앞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켜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대한 평가를 묻는 질문에는 “역사와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는 말로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했다.  이를 두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 전 위원장에게 국가란 곧 아버지 그 자체다. 아버지가 발전시킨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정치에 입문했다”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박 전 위원장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문제로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켰던 이회창 전 대표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대선후보경선 룰과 관련한 마찰 등이 더해져 결국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처럼 2000년대 초반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정치력을 넓혀나갔다.

최근에는 이러한 정치적 경험과 활동이 박 전 위원장을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야권과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유신과 독재의 상징인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불통, 제왕적 리더십”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1일에는 통진당의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비례대표 경선과정의 부실·부정 의혹이 ‘종북 논란’으로 확산되자 박 전 위원장은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고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에 야권에서는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칭하는 박 전 위원장의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며 역공을 가하기도 했다.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부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한편 국회공직자윤리위워회가 지난 2월 공개한 ‘2012년 국회의원 재산변동 및 등록사항’에 따르면 박 위원장의 재산은 21억 8,104만원이다.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단독주택(317.85㎡)이 19억 4,000만원,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 6,000만원 상당의 맨션(105.60㎡)을 소유하고 있으며 전세 4,000만원에 지역구 사무실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예금액은 7,815만원이다. 차는 2008년식 에쿠스(4500cc) VL450 차량과 2008년식 베라크루즈(3800cc) 등 2대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

박근혜의 경쟁력

박 전 위원장이 수년간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위기에 직면한 새누리당을 총선에서 두 번이나 선방 또는 승리하도록 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불필요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박 전 위원장은 정치적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또한 ‘비운의 여성 정치인’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 또한 장점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2002년 박 전 위원장이 주장했던 오픈프라이머리 경선 방식을 최근에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영남권 신공항과 관련해 밀양과 부산을 두고 우왕자왕하는 모습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이를 두고 한 야권관계자는 “콘텐츠가 없는 ‘이미지 정치’를 한다. ‘몽환의 리더십’을 구사해 선거에서 표를 얻는 것 외에 정책적 비전을 보여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지난 4월 총선에서 보여준 영남권에서의 맹목적인 지지와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의 높은 지지는 ‘이미지 정치’에 근거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지난달 23일 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 씨와 박 전 위원장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야권의 박 전 위원장에 대한 검증도 시작됐다. 네거티브로 불의의 일격을 받지 않는 이상 미래권력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박 전 위원장이 언론과 야권의 검증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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