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보수’ 김용갑 전 의원 에세이 화제

 

원조 보수로 대변되는 김용갑 전 의원의 에세이 ‘굿바이 여의도’가 지난 달 출간되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김 전 의원은 이 책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쓴소리를 내뱉어 화제를 모았다. 일각에서는 ‘보수꼴통’이라며 비판도 받아 왔지만 18대 총선을 3개월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는 모습에서는 아름다운 퇴장이란 찬사도 받았다. 보수주의자로서 정치 생활을 마감하는 인간 김용갑을 책 ‘굿바이 여의도’를 통해 알아봤다.

 

12년간의 의정활동을 정리하는 에세이 집 ‘굿바이 여의도’에는 김 전 의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공, 6공 때 정부 요직을 지내며 겪었던 일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 10년 전 아내의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병수발을 했던 일 등등 김 전 의원의 일생이 담겨 있다.

특히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에서 자신이 지지했던 박근혜 전 대표는 물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충고도 빠지지 않았다.

 

김 전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사람보다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최근 쇠고기 파문과 상황과 맞물려 이대통령의 리더십을 엿보게 하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특히 지난 숭례문 화재 사건을 보면서 김 전 의원은 이 대통령 주변에 직언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김 전 의원에 따르면 “화재로 불탄 숭례문 복원에 대한 국민성금을 모금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화재의 원인이 정부에 있다는 비판이 거센 상황에서 국민들 쌈짓돈으로 복원하겠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네티즌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그래서 난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뜻을 전하자 김 부위원장은 ‘글쎄요. 저는 그게 문제될게 없다고 보는데요.’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곁에서 국민여론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 전혀 동떨어진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을 멀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시장 시절 자신을 반대했던 서울시 총무과장을 도리어 포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주위에서는 자르라고 했지만 중용했다는 기사가 났다. 당시 이 기사는 이명박 경선후보의 관용의 덕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화제가 됐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다른 신문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총무과장은 한직으로 좌천됐고 끝내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이었다.

 

 

 

                                       ‘굿바이 여의도’에서 이대통령에게 쓴 소리

                        ‘보수 꼴통’의 아내 사랑하는 이야기도 담아

 

 

이에 대해 김 전 의원은 “이 대통령과 오찬 하는 자리에서 내가 상반된 언론보도를 거론하며 포용하는 얼굴과 심기에 맞지 않는 사람은 과감히 내치는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 얼굴이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의원은 이 대통령에게 민심을 듣고 ‘인간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것을 충고했다.

“일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심정을 보듬을 생각 없이 무조건 일을 밀어붙이는 불도저형이면 곤란하다. 그래야만 대통령이 말하는 ‘경제살리기’도 이뤄질 수 있다. 기업의 CEO는 단기간에 이윤을 창출해야 하지만 대통령은 더디 가더라도 국민의 뜻을 받들어서 가야한다. 성공한 CEO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혹독한 체질 개선이 전제되어야 한다.”

 

김 전 의원은 박 전 대표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충고를 보냈다.

“이제껏 박 전 대표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보여준 지도자적 자질, 18대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 겪었던 비애 등 많은 일들을 겪으며 충분히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박 전 대표에게 한 가지를 바란다면 원칙을 위한 원칙이 아니라 파워를 발휘할 수 있는 원칙과 강한 승부수가 절실하다. 필요 이상의 원리 원칙에 스스로를 옥죄는 대신 차라리 울어라.”


평범한 시민으로

김 전 의원은 1936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7년, 중학교를 5년 동안 다니면서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김 전 의원은 “내 또래 연령층은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열악하고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배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집안 사정으로 7살 되던 해 맏형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간 김 전 의원은 일본 사람들의 텃세와 멸시에 찬 나날을 보냈다. 길을 가다가도 난데없이 몰매를 맞기도 하고 손가락질을 해대며 놀려댔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김 전 의원은 고향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고국에 돌아와 다시 공부를 계속했지만 그것도 잠시, 해방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려운 형편에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던 김 전 의원은 농사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은 있었다. 바로 지금의 부인을 만난 중학교 시절이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복학을 했던 중학교 시절 신입생 중에 ‘김하야’라는 여학생을 처음 보았다.

 

김 전 의원은 “내 눈엔 하얀 피부의 그녀가 동화 속 공주 같았다. 이름만큼이나 맑고 청초한 첫인상의 그녀를 본 순간 한순간에 빠져들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친구의 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엔 대 놓고 연애를 하기도 힘들었던 시대였다.

 

항상 그녀 생각뿐이었던 김 전 의원은 군인이 돼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육사에 들어가게 됐고 김 씨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당시만 해도 김 씨는 김 전 의원을 사람 좋은 선배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의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로 결국 김 씨도 사랑을 느꼈고 결혼까지 성공하게 된다.

 

김 전 의원은 “아내로 맞이하고서 제대로 해준 게 없다. 10년 전 아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중요성을 몰랐다. 오랜 투병 생활로 힘들어 했던 아내를 위해 내가 해준 것은 없다. 이제 정치 생활을 마감하고 아내를 위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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