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 한국전쟁’ 사진집 발간 화제

최근 6.25 당시의 사진집이 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번에 발간된 사진집 ‘우리가 본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했던 고 임인식 씨가 남긴 흑백사진 150여 점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 사진집은 이전까지 6.25 전쟁 사진들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찍은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또한 이번 사진집에는 임 씨의 종군일기도 함께 수록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뉴스포스트>에서는 ‘우리가 본 한국전쟁’을 통해 6.25의 참상을 살펴봤다.


 

임 씨는 육사 8기로 임관하여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사진대 대장으로 1952년까지 종군했다. 예편 후에는 대한사진통신사를 설립해 기자 신분으로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이번 사진집에는 전쟁발발에서부터 휴전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여러 측면을 생생한 사진들로 보여주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북진과 평양시민환영대회, 전란으로 파괴된 서울 시가지, 피난민 등 한국전쟁의 주요 이슈들을 망라하고 있다.

 

포항전선을 시찰하는 김석원 장군, 낙동 강전선에 종군기자로 투입된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진해를 출발하는 국군 해병대, 북진하는 국군과 이를 환영하는 주민들, 휴전회담장으로 들어서는 공산측 대표 남일 장군 등의 사진들은 귀중한 역사적 순간들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과 함께 수록한 임 씨의 종군일기는 전쟁 발발 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평양시민환영대회까지의 상황과 소회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사진집의 의미는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6․25 관련 사진들이 미군 소속 종군 사진기자들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 우리의 시각으로 기록된 사진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출판사측 관계자는 “이경모, 임응식 등 한국전쟁에 종군한 국내 사진가들이 없지 않으나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종군에 그쳤다. 국방부 소속으로서 전쟁기간 내내 종군하였던 임 씨의 종군사진들은 한국전쟁의 전모를 진행과정에 따라 충실하게 기록한 유일무이한 성과”라며 이번 사진집을 높이 평가했다.

 

이번 사진집을 발간한 임 씨의 아들 임정의 씨는 “한 장의 사진은 백 마디의 말보다 중요하다. 이념을 떠나 전쟁의 아픔과 슬픔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여주고파 사진집을 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임 씨의 종군일기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임인식 사진대장 150여 점 공개

                  윈스턴 처칠 수상 아들, 종군기자 활동 중 총상

 

6월 25일(일요일)

아침에 연락병이 비상소집이라고 집으로 찾아왔다. 가끔 옹진지구나 38선에서 충돌이 있을 때마다 비상소집이 걸리기 때문에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하면서 평상시의 카키 군복 차림으로 명동에 있는 국방부 정훈국 사무실로 나갔다. 정문 보초가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하였다. 보도과로 들어가니 전화 받는 참모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국부적인 충돌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서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곧 비상소집 회의가 열렸는데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이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였고, 지금 개성지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상황의 전부였다. 보도과장 김 중령은 나에게 “각 신문사의 출입기자들을 인솔하고 개성 방면으로 가서 취재를 하라”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오전 10시 30분경에 GMC 트럭 한 대에 동아일보 김진섭, 조선일보 윤거정 기자 외 7, 8명의 기자들을 태워 가지고 문산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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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1사단 백선엽 사단장은 26일 새벽 2시 30분경에야 전방지휘소에서 돌아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북괴군이 대거 남침을 하고 있지만 우리 1사단의 강력한 반격으로 격퇴 중이어서 낙관적인 상황이라고 했다. 나와 기자들 일행은 새벽에 서울로 빈손으로 돌아와“국군의 정예부대 북상! 총반격 중!”이라는 호외를 찍어서 뿌리고 방송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서울 거리는 불안에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6월 27일

정오경 국방부와 육군본부으로부터 전세가 불리하니 한강을 건너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사진기재와 중요한 원판을 정리하여 시흥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도착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원위치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내일 28일에는 일본 동경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전방지휘소가 영등포에 설치되고 미군이 참전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안도감 속에 다시 명동의 정훈국으로 복귀하여 짐을 풀고 정리를 하였다.

어느 때부턴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미아리 쪽에서 피아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적의 포탄이 돈암동 부근에 떨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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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몸으로 사진반 암실에 들어가 잠에 취하고 말았다. 얼마 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후퇴하라고 소리치고 나갔다. 정신을 차려 일어나 보니 스카라극장 쪽에서 북한군의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의 유일한 무기인 라이카 카메라를 어둠 속에서 찾아 목에 메고 정문으로 나왔다. GMC에 탄 우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용산 쪽으로 나오는데 시민들이 피난하느라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였다. 당시는 등화관제로 헤드라이트를 켤 수가 없어 서행하면서 나의 집이 있는 삼각지 로터리를 지날 무렵에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들렸다. 순간 적기의 공습인가 아니면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의 폭파음인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집 앞을 지나면서 그쪽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얼굴을 잊으려는 심산이었고, 군인으로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소걸음으로 움직이던 차량 대열이 용산역 부근에 이르자 아예 정지하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하여 한강 다리가 모두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나는 이영치 대위와 인도교로 걸어갔다. 중지도 섬에 이르니 다리 밑에서 파괴되어 부서진 수도관의 받침대가 불타면서 수면을 비치고 있었다. 불빛 속에서 나룻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이 대위와 함께 다리 밑으로 내려가 강가에 떠 있는 배를 끌고 왔다. 이때 갑자기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10여 명이 개미떼처럼 배에 올라탔다. 위험했지만 철교 있는 쪽으로 배를 대어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6월 29일

수원에서 주먹밥 한 개를 먹고, 라이카 카메라를 목에 메고 취재차 영등포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후퇴했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장교 계급장을 떼어 버리고 행동하였다. 한강철교 부근의 국군방어선과 파괴된 한강철교 등의 장면을 담고 영등포를 거쳐 시흥 쪽으로 향하였다. 언덕길에 이르러 서울 시내 쪽을 촬영하고 있는데 시흥 쪽에서 여러 대의 차가 오더니 내 옆에 정지하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와 채병덕 참모총장이 김종갑 대령의 안내를 받으며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하게도 맥아더 장군의 최전선 시찰 장면을 촬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7월 10일

어제 우연히 만난 한국 공군의 미 고문관 니콜라스 씨와 미 제24사단 지휘소에 들렀다가 어젯밤에 충남 연기군 전의면 부근에서 적의 T-34 전차 3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니콜라스 씨에게 사진촬영의 방편을 부탁했다. 그러나 미군 참모들은 교전지구라 일반 차량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는 미군 전차를 타고 현장까지 들어가는 편의를 얻었다. 미군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우리가 탄 전차는 전의와 전동 사이의 철로 옆에서 파괴된 적의 T-34 전차의 잔해를 찍을 수 있었다. 또한 양손을 전깃줄로 묶어 총살한 미군의 시신도 찍을 수 있었다. 나올 때도 미군 전차의 지원하에 적의 총탄이 스치는 속을 무사히 통과해 대전으로 돌아왔다.

현상된 사진을 제일 먼저 AP통신의 신화봉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최초의 사진으로 전송되어 7월 12일자 전 세계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사진들은 개전 후 처음으로 대전·대구·부산 등지에 가두 전시되기도 하였다.

 

 


8월 23일

한국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 기자가 대구에 있던 국방부 정훈국에 찾아와 취재와 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지프차로 영천 방면 제2군단사령부 유재흥 장군의 예하부대를 돌며 취재하게 하고 이어서 왜관의 미 제1기병사단으로 안내하면서 동행 취재를 하였다.

저녁 때 처칠 기자는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적진을 취재하겠다고 제의했고, 그날 밤 11시경 미군 정찰대원 5명의 지원하에 적진 취재에 나섰다. 왜관철교 아래쪽 과수원에서 위스키 한 병을 서로 나눠 마시고 난 후 그는 나에게 소지품을 맡기고 5명의 미군 정찰대원과 함께 물살을 헤치면서 낙동강을 건너갔다. 이때 아군의 맹렬한 지원사격이 있었다. 그러나 1시간 뒤에 돌아오겠다고 한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두 시간이 지난 새벽 1시경에야 복귀 예상지점으로부터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돌아왔다. 처칠 기자는 왼쪽 다리에 적의 총탄을 맞아 미 정찰대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는 OP관측소에 들러서 적정을 설명했다. 곧바로 그곳에 포격이 집중되었다. 적진에 들어가 취재하다 부상당한 처칠 기자의 모습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가 영국으로 귀국한 뒤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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