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드러난 ‘일제 만행’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3·1운동·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 최초 공개

1953년 이승만 정부 조사 자료… 사료·피해자 배상 근거로 가치 높아


[뉴스포스트=허주렬 기자]국가기록원이 지난 19일 그간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3.1운동과 관동(간토)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를 최초로 공개했다. 또 강제징용 피해자 23만여명의 구체적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새로이 발표했다. 이번에 공개된 명부는 1953년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 작성한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겪은 피해와 시련을 연구할 사료로서의 가치와 함께, 유족들이 독립유공자 추가 신청 및 피해 보상을 청구할 때 좋은 근거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 박경국 국가기록원 원장이 지난 19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이승만 정부 때 작성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 등을 공개하고 있다.<사진제공=뉴시스>

국가기록원 박경국 원장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승만 정부가 1953년 작성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1권 217장·630명)’,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1권 109장·290명)’,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65권·22만9,781명) 등 3종 총 67권의 자료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일제 만행 밝힐 새 자료 공개

이 명부는 일본 도쿄의 주일한국대사관 창고에 보관돼 있다가 지난 6월 이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돼 8월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것이다. 명부들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주소와 생년월일뿐 아니라 살해당한 구체적 정황이 담겨있어 일제강점기 참혹한 실상을 알려줄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 희생자 유족들이 독립유공자 추가 신청 및 피해 보상을 청구할 때에도 좋은 근거로 활용될 전망이다. 특히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최초의 기록이어서 가치가 더 높다.  

구체적으로 이 자료는 1952년 12월 15일 국무회의에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에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한 명부다. 박경국 원장은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1953년 12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유시를 통해서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이듬해 4월 제2차 한일회담 준비를 위해서 자료를 준비해 주일대사관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3종의 명부를 하나씩 살펴보면 우선 ‘3.1 운동 피살자명부’는 1권 217매로 지역별로 모두 630명의 희생자가 실려 있다. 그간 3.1운동 당시 순국한 분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들은 총 총 391명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어떠한 명부도 발견되지 않아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번에 발견된 명부에는 일부지역의 경우 읍·면 단위로 성명,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충남 천안군 편에 적힌 유관순 열사에 관한 항목이다. 명부에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나이는 17세, 순국일시는 단기 4255년(서기 1922년), 순국장소는 서대문 형무소, 순국상황은 “3.1운동으로 인해 왜병에 피검돼 옥중에서 타살”이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에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가 1권 109매로 구성돼 있으며, 희생자 290명이 기록돼 있다. 그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피살자 수는 적게는 6,000여명에서 많게는 2만여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구체적 희생자 명단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명부에는 2세에 불과한 아기를 포함해 일가족 4명이 모두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례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피살자 명부 숫자가 예상보다 적은 이유는 일본의 피살자는 조사되지 않고 국내 연고가 있는 피살자만 기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는 이와 관련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국가기록원은 이번에 발견된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 외에도 이승만 정부 노동청이 1957년 작성한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 등을 보존하고 있다.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에는 모두 28만5,771명이 등재되어 있으나 이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피징용자로 인정한 숫자는 약 16만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기존 명부는 생년월일과 주소 등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피해자로 바로 판정할 수가 없고 별도의 사실관계 확인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의 등재자수는 모두 22만9,781명으로, 1957년도에 작성된 종전 명부보다 인원은 5만5,990명이 적지만, 종전 명부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년월일, 주소 등이 포함되어 있어 피해자 보상심의를 위한 사실관계 확인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경국 원장은 “앞으로 이 자료를 국가보훈처 등 관련부서에 제공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과거사 증빙자료로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라며 “개인 명부별로 세부사항을 정리해 2014년 초부터 일반국민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국가기록원이 지난 19일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의 만행을 밝힐 새 자료를 공개했다. 사진은 이번에 발견된 명부 중 충남 예산군 3.1운동 피살자 명단 일부.<사진제공=국가기록원>

▶신중한 정부, 격분한 여야

이와 관련해 정부는 한일관계를 고려해 신중히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번에 발견된 명부의 성격, 내용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다만 정부는 후속 조치로 추가로 각 부처와 재외공관, 지방자치단체에 과거사 관련 자료가 있는지 실태조사를 할 계획이다.

반면 여야는 한목소리로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은 논평에서 “우리 정부는 늦었지만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새롭게 드러난 관동대학살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을 받아내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자칫 가려질 뻔한 일제 강점기 과거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도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만전을 기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민주당 김관영 수석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이번에 발견된 명부에는 그간 피해자 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3.1운동과 관동대학살 피해자들이 포함돼 있어 그 의미가 상당하다”며 “그동안 일본정부는 1965년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우리 국민에 대한 피해배상이 마무리됐다고 주장해 왔지만 한일청구권 협정 8개 항목에 관동대지진 피해자 배상이 빠져 있어 이들에 대한 피해보상 문제는 검토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