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무장세력이 국내 몰려온다


- 엔고 천정부지 치솟자 해외 기업 인수 잇따라
- 국내 투자 일단 긍정적, 과도할 땐 역작용 우려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 엔고현상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일본 역시 내수시장 침체에 빠져 있다. 이에 따라 2009년 상반기 일본 투기성 자금과 기업들이 동반으로 세계시장을 비롯해 한국으로도 상당부분 향할 거라는 전망이 나와 주목을 끈다.

 

 

지난 연말부터 이어져 온 엔 고현상이 연초 주춤했다가 다시금 치솟을 기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세계외환보유 2위를 달리고 있는 일본의 엔화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금융 손실이 미국과 유럽 등 기타 선진국보다 작아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가치 상승 효과를 더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엔 강세 현상은 달러화에 대해서 뿐 아니라 여러 통화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지닌다. 엔대원 환율 곡선을 보면 지난 해 1월 838.2원에 머물던 것이 11월 들어 1,440.71원까지 올라 연초대비 72% 이상의 상승세를 보인 바 있다. 이는 9월에서 11월까지 폭발력 있게 진행된 세계경제위기가 각 화폐 당 엔화 가치상승에 적잖은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같은 엔고현상은 일본 내수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고용이 줄어들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산업시장의 악재를 가져온 것이다. 일본 다이와총연은 올 초 발표한 2008-2009기업실적 전망에서 “세계경제의 동시 감속에 의한 광범위한 수요 감퇴와, 엔화 강세 등 기업의 외부 환경에 있어 어려움이 증가하고 있다”며 “이 같은 현상이 2008년에 이어 2009년까지 이어질 것이나 2010년에 들어 완만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더욱이 미국발 세계적 경제위기로 인해 금융시장의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순채권국이자 기술보유국인 일본 엔에 대한 수요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현재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유명 경제 토론방에서는 올 상반기를 지나며 엔대원 가치가 1,800원에서 2,000원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단 어느 정도 선까지 가격대가 치솟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려하면서도 엔고 현상이 당분간 더 지속될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비록 일본의 실물경제 침체가 예상되고 있으나 미국과 EU 경제 침체 폭이 더 클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국제금융시장에서 엔화는 상대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되고 있어 엔화 강세는 지속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20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을 앞두고 다소 주춤했던 엔고 현상이 다시금 꿈틀거리며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한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 때 기대감에 따른 일시적 달러 매수로 인해 엔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취임 후에 바로 착수해야 될 ‘빅3’ 문제가 쉽게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 노동력 500만의 생사가 달린 빅3 문제 해결이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경우 달러대 엔이 75엔대까지 이르게 된다면 이에 대한 엔대 원이 2,000원까지 치솟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기업 해외진출 가속화 

 

이처럼 엔고현상이 증폭되면서 일본 수출업체의 어려움도 동반 상승하고 있다. 전문가들 중에는 일본이 이 같은 위기를 해외진출의 호기로 삼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실제로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달러대 엔이 94엔까지 치솟은 경험이 있다. 이는 일본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 기업들이 살인적인 환율로 인해 수출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원가절감, 강도 높은 경영쇄신 등을 통해 비용을 줄였으며, 한편으로는 노동력과 시장점유율 유지를 위한 대외경쟁력 제고에 힘쓴 결과 해외거점 마련의 기반을 닦아 놓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전례를 경험한 바 있는 업계에서는 이번 엔고현상 시기를 통해 일본기업들이 적극적인 해외 기업 유치 및 투자사냥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이미 일본기업들의 해외 기업 유치현상은 엔고 현상이 이어지던 지난 연말부터 일었던 것이다. 지난해 11월 일본의 3대 주류업체 중 하나인 산토리가 뉴질랜드 대형 음료회사인 푸르코를 사 들이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다이이치산쿄가 인도 최대 제약회사 란박시를 인수하는 등 일본기업들은 경제위기를 기화로 잇따라 파산 및 경영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해외 알짜 기업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해외 출자도 활발하다. 미쓰비시 UFJ 그룹은 모건 스탠리에 90억 달러를 출자해 주식 21%를 확보했다. 현재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약 1조 달러에 이르며 이는 중국의 1조 8,00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대외경제연구원은 ‘엔화강세와 파급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은 부실과 도산이 우려되고 있으나, 일본 금융기관의 경우 상대적으로 손실이 작은 수준이며, 오히려 주요 국제 투자은행의 M&A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 같은 일본기업 및 자본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일본계 자금은 현재 주로 기술력이 뛰어난 중소·벤처기업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일 업계는 일본 최대 금융그룹인 SBI홀딩스가 지난해 말부터 한국기술투자 주식 314만주를 사들이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주식량은 한국기술투자 전체 주식의 3.4%에 해당하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SBI홀딩스는 이보다 앞서 지난해에도 한국기술투자 계열사인 KTIC홀딩스에 250억 원의 자금을 투자해 한국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외에도 일본의 서부전기는 지난 11월 모건코리아 주식 26만 주를, 닛신보는 새론오토모티브 주식 441만 주를 각각 사들였다. 일단 국내기업들은 일본의 이 같은 적극적인 투자 움직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기업경제전문가는 “엔고현상으로 인한 엔화의 가치상승과 구매력 증가를 고려해 FDI형태로 일본 자본을 적극 유치할 필요가 있다”며 “일본으로부터의 외국인 투자는 엔화만이 아닌 달러와 원화의 형태로도 유입되고 있어, 유동성 부족 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금융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엔고 현상 득실 잘 따져야
 
그러나 엔고현상이 우리 경기에 미치게 될 악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11월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업체 중 55.2%가 외화대출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중 활용통화 15.5%는 엔화대출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엔고현상이 지속될 경우 이처럼 높은 엔화 부채비율이 우리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환차 뿐 아니라 엔화 대출금리 상승에 따른 이자 부담 상승도 우리 기업들의 목을 조이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외화대출 상환 횟수에 대한 제한을 폐지함에 따라 엔화 대출 연장이 가능해졌으나, 시중은행에서 만기연장에 대한 높은 수수료를 요구함에 다라 큰 실효를 거두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14일 <비즈니스위크>는 “일본 경기 5년전 경기하강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견고한 구조를 바탕으로 이번 엔화강세를 기점으로 한 활발한 M&A에 나설 것”이라며 이 같은 이유로 일본 정부가 엔고현상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적극 개입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비즈니스위크>는 또한 “일본이 지난 해(1~10월) 동안 291개 기업을 인수했으며, 전해 인수금액의 2배인 590억 달러 규모”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엔고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 등의 상황을 끝까지 두고 볼 것이라는 시각은 많지 않다. 지난 10월 말 일본 재무상인 나타가와는 “시장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며, 필요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엔화의 급격한 가치절상이 지속될 경우 정부가 개입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대외환경의 압박 또한 일본 정부의 개입을 추동할 것으로 보인다. G7은 지난 해 10월 28일 긴급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최근 엔화환율의 급변동을 우려하고 있으며, 필요시 공조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정부가 엔고현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시기까지 일본기업 및 자금의 해외공략이 집중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적인 엔고 현상이 국내 경기에 득이 될 것인지 실이 될 것인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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