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마라토너, 마침내 턱수염을 깎다

 

“이젠 아내가 해주는 음식 맘껏 먹고파”
은퇴 후 육상 관련 봉사 활동 소망 밝혀

 

 

이봉주는 이제 더 이상 턱수염을 기르지 않는다. 중요한 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기르던 턱수염은 그의 결연한 의지의 상징이요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그에겐 이제 더 이상의 지독한 식이요법도 수천 킬로미터와의 싸움도 남아있지 않다. 충남 천안의 ‘봉주로’가 마침내 자유로가 된 것이다. <뉴스포스트>는 지난 17일 인간 이봉달로 돌아가는 그와 경기도 화성 소재 삼성전자 육상단 챌린지 캠프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이봉주 선수와의 일문일답.

 

-최근 열린 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끝으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특히 20년간 총 40회 풀코스 완주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일궈내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먼저 은퇴 소감부터 밝힌다면.


“수치상으로 따지면 정말 많은 거리를 달렸다. 일 년에 두 번 완주를 하며 20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고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영화장면처럼 아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조금 더 젊었더라면 더 많은 경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메달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아쉬움과 미련은 후배양성을 위한 경험과 노하우로 보답하겠다. 은퇴가 늦어지게 된 것도 달리는 것을 워낙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메달에 대한 아쉬움도 컸었다. 이제 그 몫은 후배들에게 넘기겠다.”

 

-이번 고별 경기를 어떻게 준비했나.


“사실상 순위 싸움보다는 40번째 완주에 주력했다. 경기 전까지 체력과 컨디션이 좋지 않아 감독님도 완주를 기대를 하지 않았다.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뛰라고 했고 결국 완주를 해내면서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불혹을 앞둔 나이에 느끼는 신체적 한계나 변화가 있는가.


“체력적인 면에서 회복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 속에서 세월의 무게까지 이기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은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그렇다. 마라톤은 극한의 피로감을 극복하며 스피드는 내는 순위 싸움이다. 때문에 40대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줄곧 은퇴설이 나돌았다. 계속해서 선수생활을 한 이유가 따로 있나.


“마라톤 후배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국내 현실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또 스스로 다른 젊은 선수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힘든 훈련량을 똑같이 견뎌냈고 다시 재기할 자신도 있었다.”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우수한 기록을 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타고난 체력도 있겠지만 다양한 국제경기 경험과 그에 따른 기록향상을 위한 노력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에 비하면 노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한국 마라톤계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노력도 부족하지만 젊은 선수들의 틀에 박힌 훈련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국체전이 육상의 발전을 저해한다’ 라는 목소리가 있듯이 기록보다는 순위 경쟁이나 메달 획득에 치우쳐있는 전반적인 육상계의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 젊은 선수들 스스로도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하고 주변에서도 많이 도와 줘야 하지만 은퇴 후의 보장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선수에게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봉주 선수의 턱수염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가.


“하하. 그렇다. 당분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국민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 선수의 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2000년 도쿄 대회 당시 수십 명의 일본 팬들이 호텔로 찾아오고 경기 당일에도 수많은 팬들이 도로에서 응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이 국적도 다른 이봉주 선수를 이토록 좋아하게 만들었다고 보나.


“한국 팬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팬들은 특히 포기하지 않고 한결 같이 꿋꿋이 달리는 정신자세를 높이 평가해준 것 같다. 그동안 많이 성원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준 국내외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수년 전부터 국내 마라톤 인구가 크게 늘었다. 마라톤 마니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라톤을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다.”

 

-은퇴 후에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뭔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지금으로선 무엇보다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먹고 싶다. (잠시 생각하더니)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황영조 선수는 은퇴 후에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 사실 삼성전자 육상단도 1년에 수차례씩 봉사활동에 참여해 왔다. 기회가 된다면 은퇴 후에도 봉사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이번 은퇴에 대해서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한다. 그동안 가족과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은퇴 후에 아이들 하고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두 아들이 나중에 마라톤 선수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하하.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만 본인이 정말 하고 싶어 한다면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운동에 소질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봉주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바빴다.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준 그는 인터뷰 내내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그것은 타고난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 ‘정직한 전진’을 위하여 20년동안 그가 스스로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을 채찍질했을까를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
모든 스포츠 영웅들의 전기에서 보듯이 성공의 열쇠는 자신에게 정직해 지는것에 있다.

이런 그의 자세를 보며 언젠가 읽었던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경구가 떠올랐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아십니까?
첫째는 자신이 향상시키려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 잘 짜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가까이에서 주목하는 코치가 있어야 하고 그로부터 적절한 피드백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는 무조건 오래 반복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을 하루에 3시간씩 빠짐없이 10년 동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1만 시간의 법칙입니다.“

어쩌면 이봉주 인생 마라톤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 모른다. 그가 살아온 마라톤 인생보다 몇 배나 더 값진 봉달이의 마지막 인생 마라톤 완주를 우리 국민들 모두 기대하고 보고싶을 것이다.

 


 

<이봉주 마라톤의 역사>

 

○1990.10.19 제71회 전국체육대회 2위, 2시간19분15초(풀타임 첫 완주)
○1991.3.17 동아국제마라톤 15위, 2시간16분56초
○1992.1.26 도쿄국제하프마라톤 4위, 1시간1분4초(한국신기록)
○1993.12.12 호놀룰루국제마라톤 1위, 2시간13분16초
○1994.4.18 보스턴마라톤 11위, 2시간9분57초
○1994.9.24 제48회 조선일보마라톤 1위, 2시간9분59초(대회신기록, 풀타임 10번째 완주)
○1995.3.19 동아국제마라톤 1위, 2시간10분58초
○1996.8.4 제26회 애틀랜타올림픽 2위, 2시간12분39초
○1996.12.1 제50회 후쿠오카국제마라톤 1위, 2시간10분48초
○1998.4.19 로테르담마라톤 2위, 2시간7분44초(한국신)
○1998.12.20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1위, 2시간12분32초(풀타임 20번째 완주)
○1999.4.18 런던마라톤 12위, 2시간12분11초
○2000.2.13 도쿄국제마라톤 2위, 2시간7분20초(한국신)
○2000.10.1 제27회 시드니올림픽 24위, 2시간17분57초
○2001.4.16 보스턴마라톤 1위, 2시간9분43초
○2001.8.3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기권)
○2002.10.14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1위, 2시간14분4초
○2003.4.13 런던마라톤 7위, 2시간8분10초
○2003.8.30 파리세계육상선수권 11위, 2시간10분38초(풀타임 30번째 완주)
○2004.8.30 제28회 아테네올림픽 14위, 2시간15분33초
○2005.9.25 베를린마라톤 11위, 2시간12분19초
○2006.3.5 일본 비와코마라톤(기권)
○2007.3.18 서울국제마라톤 1위, 2시간8분4초
○2007.10.7 시카고마라톤 7위, 2시간17분29초
○2008.8.24 제29회 베이징올림픽 28위, 2시간17분56초
○2009.3.15 서울국제마라톤 14위, 2시간16분46초(풀타임 40번째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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