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우에 불만 품고 기술 통째로…”

1200억 원짜리 기술, 80억 원에 넘기려
거사 자금 댄 전 대기업 회장 정체 주목


첨단기술은 한번 유출되면 기업의 미래는 물론 국가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최근 국가연구개발자금 200억원이 투입돼 개발된 첨단 나노기술을 중국 경쟁업체에 유출시키려던 일당이 붙잡혔다. 특히 이 기술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이었다. <뉴스포스트>는 자세한 유출 경위를 취재했다.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곳은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이혁 부장검사). 플라즈마를 이용한 금속표면처리기술(OPZ, Optinum Plasma Zone) 등을 빼돌려 중국 에어컨업체에 넘기려한 혐의(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등에관한법률상 영업비밀누설 등)를 받고 구속기소된 사람은 P사로 알려진 벤처기업의 전 대표이사 고모씨와 전  임원 주모씨 등 2명. 주 씨는 LG전자의 에어컨 공장 건설에 참여했던 기술자와 공모해 공장 도면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또한 고 씨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이사 등 2명은 불구속 기소, 중국에 도피중인 연구원과 전직 대기업 회장 등 2명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의 신상명세는 자세히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에 따르면 고 씨 등은 2007년 10월 P사를 퇴사하면서 플라즈마 기술 외에도 나노파우더(NAP)·박막증착(ITO)·금속표면처리(OPZ)기술 등을 빼돌렸다.


P사는 한국기술개발원(KIST)이 개발한 특허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2000년 3월에 설립된 벤처기업. 국가연구비 200억원을 들여 플라스마를 이용한 표면처리 기술 등을 개발했는데, 이에 중추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 당시 카이스트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고 씨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기술개발원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고씨가 P사의 대표이사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나 고 씨 등 6명은 한국기술개발원의 처우가 미흡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 2007년 퇴사와 함께 자료를 빼돌렸고,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대기업 회장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투자받아 중국에 회사를 차렸다.


고 씨는 노트북에, 다른 직원들은 USB메모리나 외장하드 등에 기술관련 자료를 담거나 사용하던 노트북을 반납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유출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특히 이들은 중국 요녕성에 I사를 설립해 P사와 동일한 사업을 진행하며 이 기술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에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특허 출원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제품 상용화가 여의치 않자, 이들 기술과 관련된 각종 자료와 이 기술이 적용된 LG전자 에어컨공장 레이아웃 도면을 중국 에어컨 생산업체에 넘기려고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범죄 첩보를 입수하면서 이들의 범행이 발각되었다. 이 기술이 중국 경쟁업체에 넘어갔을 경우 LG전자에 1,200억원 상당의 피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관계당국은 추산했다. 이에 반해 고 씨가 받기로 한 계약금은 80억원에 불과했다.


한편 플라스마를 이용한 금속표면처리는 재료 표면의 화학 구조를 바꾸어 잘 붙지 않는 물질을 접착제 없이도 붙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로 알려졌다. 때문에 국내 기업 중 상당수가 이 원천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LG전자는 에어컨 실내기 내부 물방울을 제거하는 데 이 기술을 적용하면서 ‘휘센’이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것은 P사이지만, 이 기술을 에어컨 열교환처리기 생산에 적용한 것은 LG의 기술이기 때문. 이 기술이 없는 회사에서는 물방울 맺힘 현상을 없애기 위해 환경오염 등 문제가 있는 계면활성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박막증착기술’은 전류가 흐르지 않는 플라스틱에 금속산화물을 증착시켜 전기전도율을 높이는 기술이다. 기술 특성상 제품화가 용이한 것으로 알려진 이 기술은, 현재 삼성전자에서 최근 선보인 휴대폰 ‘제트’ 터치패드에 사용되고 있다.

 


 

기술 유출 95%는 내부자
삼성· 등 굴지의 대기업도 첨단 기술 유출
      


그간 국내 첨단 기술이 중국·대만 등 해외로 유출되거나 유출될뻔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주목할 사실은 기술유출자의 95%가 전·현직 직원인 내부자라는 것. 이들은 연구원이나 기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버리고 왜 이처럼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2006년 3월. 삼성전자 선임연구원 이모씨가 휴대전화 회로도 등을 카자흐스탄의 정보통신회사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구속된 바 있다. 연구원 전용 사내 통신망에 접속해 정보를 출력한 후, 그는 프린트 된 문서를 카자흐스탄 정보통신회사의 임원에게 보여주며 19억원 정도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국정원이 조기에 발견하면서 첨단기술의 해외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조사 결과 이 씨는 개인 빚을 지고 있었으며, 계약 성사 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가 연간 2∼3억원 가량의 고액 연봉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 당시 삼성전자는 기술유출로 인한 피해를 1조3,000천억원 정도로 추산했다.


2008년 1월에는, 세계 1위의 우리 선박·조선 건조기술을 중국에 유출하려던 대우해양조선 전직 기술기획팀장 엄모씨가 붙잡힌 적도 있다. 퇴직하면서 선박 설계도, 공정도 등을 미리 준비한 외장형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빼돌렸던 것. 그 안에 들어있는 자료만 해도 36만5,000여개가 넘었다. 당시 엄 씨가 빼돌린 선박기술이 중국으로 빠져나갔을 경우 피해액은 모두 35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이 밖에도 국정원이 소개한 불법 기술유출 사례의 동기를 보면, 금전 유혹이나 개인 영리는 물론이고 처우와 인사 불만에 의한 사건이 많다. 심각한 고용불안을 느껴 기술을 거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돈이나 승진 등 명예를 전제로 한 유혹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중요기술을 매개물로 삼아 기회를 포착하는 것.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허술한 보안체계 보완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산업보안강화법’을 제정한 미국의 사례도 참고 할만하다. ‘경제력이 곧 국력이기도 하지만 첨단 정보기술(IT)이나 바이오기술(BT)의 경우 민수와 군수용으로 동시에 사용될 수 있다’는 기치 아래, 중앙정보부·법무부·국방부 등 유관 부처들이 모두 참여하는 ‘국가보안실’을 가동하며 첨단기술 유출 방지에 힘쓰고 있는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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