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불이익과 부당대우 두려워 피해 사실 감춰
학교 제 식구 감싸기…해임 파면 아닌 ‘면직 처리’
학생 목소리 들을 수 있는 인권센터 전국에 4곳뿐

[뉴스포스트=최유희 기자] 최근 대학교수들의 성추행 사건이 잇따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문제는 학점 취득이나 논문 심사, 취업 등의 문제와 관련 일명 교수들이 ‘갑질’을 행하다보니 성추행 등 피해를 당해도 학생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가 두려워 말 못 하고 속앓이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을 지켜줘야 할 대학에서는 징계가 아닌 면직처리를 하는 등 어물쩡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움직임도 보여 대학 사회에서 성범죄 관련 규정을 강화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학교수의 성추행 사건

▲ (사진=뉴시스)

서울대 수리과학부 K 교수가 지난 7월28일 오후 서울 한강공원의 한 벤치에서 다른 대학 소속 인턴 여학생 A씨에게 “자신의 무릎 위에 앉으라”며 신체 일부를 만진 혐의(강제추행)로 구속 수감됐다. 현직 서울대 교수가 성추행 혐의로 구속된 것은 개교 이래 처음이다.

A씨는 8월에 열린 서울세계수학자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K 교수의 업무를 돕고 있었고, 사건 발생 다음날 인턴직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진술에서 K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면서도 성추행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이 불거진 직후 서울대 내부에서 또 다른 피해자들의 제보가 이어지면서 지난 2004년부터 10년 동안 성추행한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22명이나 된다고 ‘K 교수 사건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가 주장했다.

K 교수를 둘러싼 추가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학교 측은 정상적인 강의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K 교수의 강의를 중단시켰다. 세계수학자대회의 초청 강연자 중 한명으로 선정된 석학이자 정부가 주는 한국과학상(2006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2009년)을 받기도 한 K 교수의 성추행 사건은 많은 충격을 안겨줬다.

비슷한 시기에 고려대 공과대학 소속 L 교수의 성추행 사건이 드러났다. 지난 6월부터 L교수는 자신이 지도하는 피해자 대학원생 B(23)씨에게 수시로 사적인 통화를 요구하고 본인의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강요했다.

L 교수는 B씨에게 “넌 내 첫사랑과 닮았다”고 말하며 “뽀뽀하는 시늉의 사진을 찍어 보내라”, “짝사랑한다”, “우주에서 제일 예뻐한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B씨를 괴롭혔다.

이에 B씨는 경찰 조사에서 L 교수의 요구를 거부하면 화를 내거나 다른 대학원생들을 이유 없이 야단쳤기 때문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 뿐 아니라 중앙대 L 교수는 올해 초 자신의 연구실에서 여학생의 몸을 만지는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성추행하거나 희롱했다. 이에 학내 인권센터 조사를 받은 교수는 피해자가 고소장을 제출하자 학교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학교 측은 수업을 대체할 다른 교수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사표 수리를 유보했고 중대 L 교수는 자신이 맡은 강의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과거에도 ‘갑’ 교수의 성추행은 존재했다. 서울대에서는 1993년 화학과 조교가 S 교수에게 성희롱을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이른바 ‘우 조교 사건’)을 낸 바 있는데 이는 대학 내 성희롱이 처음으로 공론화된 사건이었다. 1997년에는 서울대 약대 K 교수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대학원생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가 무고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학생들 “사표 수리? 얼렁뚱땅 학교 측 재발방지 노력해야”

▲ 서울대 K교수 카톡

최근 성추행 혐의로 교수가 구속된 서울대의 교무처는 지난달 27일 “K 교수가 전날(26일) 오후 사표를 제출했다”면서 “학교 측은 관련 절차를 거쳐 면직 조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면직처리가 되면 진상조사가 중단되기에 여론이 거세지자 뒤늦게 “사법 처리와는 별개로 신속하게 인권센터를 통한 진상조사를 벌여 다른 피해사례가 없는지 철저히 규명해 내고, 조사 결과에 따라 K교수를 징계할 것”이라면서 “조사 과정에서는 피해 학생들이 또 다른 상처를 받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서울대에서는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교수도 구속됐지만 지난 4일 서울 고려대 안암캠퍼스에는 교수의 성추행을 밝히는 여러 개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학원생 제자를 상대로 지속적인 성희롱을 벌이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이 학교 L 교수와 학교 쪽을 향한 것이었다.

반면 교수 성폭력 사건을 두고 서울대와 반대로 고려대의 결정은 엇갈렸다. 지난 11월29일 고려대 측은 교내 양성평등센터와 경찰 양쪽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L 교수의 사표를 수리했다. 학교 측이 사표 수리를 통과시켜 교수가 면직되면 징계인 해임이나 파면 처분을 당하는 경우와 달리 재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비난의 여론이 거센 것이다.

교수가 사표를 내고 나가면 징계를 피해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퇴직금을 받을 수 있고 다른 학교에 취업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표가 수리되는 순간 민간인이 되기 때문에 학내 진상조사도 할 수 없다.

이에 고려대 학생들도 학교가 얼렁뚱땅 덮고 가는 길을 택했다며 교수 성폭력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며 반발하고 있다.

학생들의 목소리 들을 ‘학교 내 인권센터’ 필요해

▲ 서울대 K교수 교내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 (사진=뉴시스)

이번에 구속된 K 교수사건 초기 일부 학생사회에서는 학교 내 인권센터가 아닌 국가인권위원회나 검찰·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 내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학내 인권센터가 한다. 하지만 인권센터를 보유한 대학은 전국에서 단 네 곳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독립기구가 아니라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지난 7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2012년 현재 조사 대상 280개교 중 성희롱·성폭력 관련 규정에 학생의 조사대책기구 참여를 명시한 대학은 53%에 그쳤고 ‘외부전문가의 참여’는 20%에 불과했다.

현재 대학 인권센터는 총학생회에서 운영하는 카이스트를 빼면 모두 학교 본부 산하의 기구여서 학생의 입장을 직접 반영하기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서울대 인권센터에 성문제와 관련한 신고가 들어오면 5인 이내의 조사위원회가 예비조사를 하는데 이 위원회에는 학생 측 대표가 한 명도 없다.
이에 전문가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추행 사건 처리와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해 학교 내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내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전국 13개 대학 대학원생 2354명을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교수한테 성희롱·성추행·언어폭력 등을 당했다는 응답자가 45.5%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중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참고 넘어간 비율은 65.3%나 차지했다. 이유는 ‘불이익을 받을까 봐 두렵다’,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다수였다. ‘을’ 학생들이 ‘갑’ 교수한테 불이익을 받을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학에서 일어나는 교수의 잇따른 성추행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대학에게 교육당국은 최대한의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강구하고, 학생들이 안심하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구체적 근절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며 “제 식구 감싸기와 꼬리자르기식 대응이 불가능하도록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하고, 성추행 가해 교수가 다시는 대학 강단에 서는 일이 없도록 강력하게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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