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지식의 보고(寶庫) 역사.문화의 공간

활황기 땐 헌책방위에 다락방 만들어 생활하기도
60~70년대 책 귀하던 시절 헌책 내놓자마자 팔려
한때 100여 개 넘게 성업…지금은 20여 곳 명맥
대학생 프로젝트 ‘설레어함’, 헌책방거리 활성화 움직임

▲ 서울 중구 을지로 평화시장 1층에 위치한 청계천 헌책방거리 모습(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인턴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 평화시장 1층에 위치한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195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서울의 유일한 헌책방거리다. 중고서적을 파는 헌책방이 하나둘 늘어가며 한때 헌책방 수가 100여 개가 넘을 정도로 성업을 이뤘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드문드문 20여 곳 정도만 남아 있다. 과거 신학기 참고서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던 까까머리 학생 단골들은 이제 어느덧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의 고객으로 변화했다.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 이용이 활성화되며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들어 헌책방거리는 지금 침체를 겪고 있다.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명맥을 이어가는 상점들을 찾아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헌책방의 현재 모습과 헌책방이 갖는 추억 및 가치를 되새겨봤다.

50년의 역사와 전통 자랑하는 ‘동신서림’

▲ 50년의 역사와 전통 자랑하는 ‘동신서림’ 최정옥 대표(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인턴기자)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50년 가까이 헌책방을 운영해 온 동신서림의 최정옥 대표는 먼저 헌책방을 시작한 형님에 이어 헌책방을 운영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비좁은 통로를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책 무더기를 가게 안쪽으로 쌓아 올리며 책 정리를 하는 최 대표를 통해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과거와 오늘에 대해 들어봤다.

“처음 여기에 책방이 20여 곳 있었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중고교과서와 참고서를 사러 참 많이 왔어요. 책 자체가 귀한 시절이었죠. 주·야간 고등학교도 있을 때라 학생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찾아와서 그 아이들을 위해 헌책방 위에 다락을 만들어놓고 생활하기도 했죠.”

최 대표는 “자본이 제일 적게 들어가는 일을 찾다가 헌책방을 시작하게 됐다”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많아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책방을 열고 있어야 했던 1960~70년대 책방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등학교가 주·야간으로 운영되던 시절 야간 고등학생들이 일이 끝난 저녁 10시에 헌책방으로 뛰어와 책을 찾곤 했다고 회상했다. 책 자체가 귀했고 헌책을 구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던 때라서 헌책을 구해놓는 족족 팔려나가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옛날엔 소설이 잘 안 나가서 중고 대학교재나 교과서, 참고서 같은 책만 취급했는데 지금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더는 들여놓지 않는다”며 “당시 대학교재, 교과서, 참고서 판매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고등학생들은 선배들이 필기를 잘 정리해놓은 참고서를 주로 사 갔는데, 선배들의 필기를 보고 공부하며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그래서 필기 흔적 있는 책만 골라서 사가는 녀석들도 많았어요.”

최 씨에 따르면 당시에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와서 교복만으로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며 ‘지방에서 온 돈이 없는 대학생들은 전당포에 물품을 맡기고 돈을 꾸어 가듯이 헌책방에다 자기 책을 맡기고 차비를 받아서 고향에 다녀오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헌책방에 전당을 잡히고 돈을 꾸어간 학생들은 고향 집에서 가져온 돈으로 맡겼던 책을 다시 찾아가곤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0년대 이후 논문 작성 때문에 자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 대학생들이 책을 종종 사 갔지만, 직접 찾아오는 중고등학생들의 발길은 전보다 뜸해졌다고 말했다. 이후에는 학원에 다니는 중고등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학부형들이 대신 찾아와 참고서를 사 갔다고 했다.

온라인·대형서점에 밀려 쇠락의 길로

“1990년대를 넘어서니 학생들이 이제 헌책 보는 것을 기피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20여 곳밖에 안 남았잖아요. 젊은 상인들은 헌책방만으로 생활이 안 되니까 장사를 접었죠. 또 지금 사람들은 책을 너무 안 읽잖아요. (스마트폰 화면에서)밀고 끌어당기기만 할 줄 알잖아요. 종이책으로 읽어야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이러니 서점이 없어질 수밖에요.”

최 대표는 기술의 발전으로 종이책이 기계로 대체되며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세태를 이야기하며 혀를 찼다.

“지금 30~40대는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세대라서 신간 서적을 사러 가지, 중고서적 사러는 안 와요.”
최 대표는 젊은 사람들은 헌책방에서 아이들 볼 책은 사 가도 자신들이 읽을 책은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대로 인터뷰하는 중간 아동도서시리즈를 찾는 30대 손님이 더러 있었다. “옛날 단골들은 자식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있다”며 특히 “어린이 책 시리즈는 다른 곳에서 만원은 줘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중고지만 깨끗한 책을 3000원에 판다. 아는 사람들은 싸다고 여기에 찾아오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다 인터넷으로 주문한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가서 인터넷에다가 가격을 올려 파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산에 많이 다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약초 관련 책이 잘 나가요. 자손들이 건강 챙겨주나? 나이 들면 자기 건강은 자기가 관리해야죠.”

최 대표는 요즘은 명심보감, 고사성어, 약초 관련 책이 그나마 조금 팔리는 편이라서 앞쪽에 들여놨다며 “내가 여길 소일하러 나오는 거지, 돈 벌기 위해 나올 것 같으면 헌책방을 안 한다. 일하며 건강도 돌볼 겸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最古)의 책’ 가득…고서, 희귀본의 천국 민중서림

▲ 고서와 희귀본 등 ‘최고(最古)’의 책이 가득한 책방 '민중서림'의 내부 모습(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인턴기자)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터줏대감인 민중서림은 고서와 희귀본을 만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책이 가득한 책방이다. 지금은 쉽게 보기 힘든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책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천장까지 쌓인 책 무더기에 한 번 놀라고 그 책들의 발행연도에 두 번 놀라게 된다. 1969년 청계고가도로 개통 당시부터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민중서림을 운영해 온 송기호 대표는 기자에게 낡고 희귀한 고서들을 여러 권 꺼내 보여줬다.

“우리 집은 오래된 책들이 많아요. 이런 책들 아마 모를 걸요? ‘로버트 박 생활영어’인데 1973년도 책이고 당시엔 900원 했는데 1~3권까지 나올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책이었어요.”

송 대표는 적어도 50년 가까이 됐거나 5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책들을 보여주며 “유명한 출판사거나 희소성이 있거나 오래된 정도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사간다”며 이런 고서들만 전문적으로 사 가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책방을 찾는 손님이 줄어서 고서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팔리지 않아 더는 들여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 민중서림의 대표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나시모토 마사코)의 저서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인턴기자)

“예전엔 사전이 참 잘 나갔는데 지금은 핸드폰으로 찾아서 공부하니까 사전이 안 나가요. 그렇게 기계로 공부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을 텐데.”

송 대표는 동신서림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전이 바꿔놓은 오늘날 학습 풍경에 대해 탄식했다. 이어 “옛날에는 전화번호도 다 외웠는데 지금은 가족들 전화번호도 단축번호로 눌러서 통화할 만큼 기계 의존도가 너무 높다”며 “공부도 사전 넘기며 스펠링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해야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고 강조했다.

민중서림을 찾은 중년의 손님은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여길 참 많이 다녔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적에 여기 책방이 100군데가 넘었는데 다른 데서 새로 나온 책을 보고 여기 와보면 그 책들이 다 있었다”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설레어함’으로 헌책방거리 활성화 나선 대학생들

▲ '설레어함'으로 청계천 헌책방거리 활성화에 나선 대학생팀 '책잇아웃(책 it out)'의 활동 모습(사진=책잇아웃)

한때 신학기 참고서를 찾는 학생들로 북적이던 이곳은 이제 더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인적이 뜸해진 헌책방거리의 명맥을 유지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최근 대학생들이 의기투합해 화제다. 그 주인공은 김수경, 김태훈, 장도련, 최예슬, 권민기, 김우현 씨로 구성된 대학생 팀 ’책 it out(책잇아웃)’이다. 책 it out은 연세대학교의 인액터스(Enactus, 사회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리더십 대학생 단체) 소속팀으로 ‘설레어함’ 프로젝트를 통해 청계천 헌책방거리 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 중이다.

설레어함은 고객이 선택한 테마에 맞게 헌책방 상인들이 직접 엄선한 3권의 책을 담아주는 큐레이션 콘셉트의 랜덤 책 상자서비스로 1회 주문 당 1만5000원에 판매된다. 책을 정기 구독하듯이 3개월, 6개월간 정기구독도 가능하다. 주문 고객은 ‘빛나라 지식의 별!’, ‘일상 속 여유 한 모금’, ‘새벽 2시보다 짙은 감성’, ‘성찰과 사색 사이’, ‘영화를 보는듯한 긴박감’처럼 취향에 따른 테마와 100% 랜덤인 ‘안알랴줌’까지 총 6가지 테마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책 it out팀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레어함 프로젝트와 젊은이들의 눈으로 본 청계천 헌책방거리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청계천 헌책방거리는 한때 지식인들의 공간이었고 지금까지도 1990년대의 책들부터 갓 나온 신간, 디자인 서적, 고서까지 다양한 책들이 있어요. 헌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일을 ‘보물찾기’라고 말할 정도로 뜻밖의 책들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베스트셀러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테고리화 돼 있는 대형서점과는 다르게 책을 추천해주시는 헌책방 사장님과 청계천 헌책방거리만의 아날로그적 감성도 느낄 수 있죠.”

책 it out팀은 “일본의 고서점 거리 ‘진보초 거리’, 영국의 작은 책마을 ‘헤이 온 와이(Hay On Wye)’, 가까이에는 부산 ‘보수동 책방거리’나 인천 ‘배다리 책방거리’ 등 헌책방 거리 보존을 위한 움직임은 많이 있다”고 예를 들며, 한국의 대표 도시 서울에서는 이러한 보존 움직임이 전혀 활성화돼 있지 않아 의아했다고 말했다. 또 “역사적, 문화적으로 소중한 공간이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대로 두면 이 거리가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껴 청계천 헌책방거리 활성화에 뛰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 이용자 2030여성…헌책방거리 온라인 플랫폼 구축할 계획

“‘설레어함’은 책 it out의 대표 아이템으로 지난해부터 헌책방 상인들이 겪는 심각한 경영난을 해소하고 헌책방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즈니스 모델 개발의 일환으로 탄생했어요. 그동안 다양한 매체에 소개돼 지금까지 1000여 개의 상자가 판매됐어요.”

헌책방이 직면한 문제인 경영난 해소와 경쟁력 강화 과제를 책 it out팀은 헌책방거리를 밝고 젊은 감성에 맞는 이미지로 변화시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헌책의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책에 관심이 없는 젊은 독자들도 흥미를 느끼게 할 만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이 ‘랜덤 박스’였다고 한다. 여기에 20여 년간 쌓인 헌책방 상인들의 전문성을 이용한 ‘큐레이션’ 콘셉트를 접목해 ‘고객의 책 취향과 사연에 맞게 헌책방 장인이 직접 골라주는 랜덤 책 상자 ‘설레어함’’으로 발전됐다고 한다.

“상자를 받을 때까지는 어떤 책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특유의 설렘과 호기심을 느낄 수 있어요. 설레어함을 통해 헌책방에 대해 알지 못했던 독자들, 특히 20~30대 독자들이 헌책방의 매력을 알게 됐고 사장님들은 더 젊은 독자들과 소통할 기회가 생겼죠.”

책 it out팀에 따르면 설레어함의 주 이용자는 20~30대 여성들이다. 이용자들 사이에서 “큐레이션 콘셉트가 책을 더 쉽고 가깝게 느낄 기회가 됐다”는 반응이 많다고 전했다. 또 이용자들이 자신뿐 아니라 주위 친구들이나 자녀를 위한 선물로도 설레어함을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설레어함에 참여 중인 헌책방 사장님들은 기존 고객층과 다른 새롭고 젊은 고객들과의 연결로 젊은 독자들의 책 취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처음보다 지금 더 설레어함을 자신들의 사업으로 자부하게 돼 책을 골라주는 셀렉션 뿐 아니라 이제는 배송과정 전체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고 계시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제안한 설레어함을 단순 호기심으로 여겼던 헌책방 상인들이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프로젝트에 임하는 중이라고 책 it out팀은 전했다. 또 설레어함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상인들이 변화의 의지를 가진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책 it out팀은 현재 밍키서점과 덕인서림 두 곳에서만 진행 중인 설레어함을 앞으로 더 많은 상인과 함께 하기 위해 마케팅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온라인에서만 판매 중인 설레어함을 오프라인에서도 판매할 수 있기를 원해요. 또 다음스토리펀딩 연재로 비용을 마련해 헌책방거리의 통일된 온라인 플랫폼을 형성하고 더 많은 온라인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 목표예요. 설레어함의 밝고 젊은 감성 이미지를 오프라인으로도 확대하는 것이 저희의 지향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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