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는 일 구호와 운동만으론 한계 느껴 정당정치 시작

▲ 8일 뉴스포스트 인터뷰에 응한 있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사진=뉴스포스트)

[뉴스포스트 인터뷰진행=이완재. 설석용 기자] "100m 육상 선수에서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로 전환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의 지금 심경이다. 박 의원은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을 시작으로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떴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97년도 대선에 참여하며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이후 약관 29세의 나이에 처음 국회의원에 도전하며 인생의 진로를 확고히 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게 구호와 운동으로 되는 게 아니란 걸 일찌감치 깨닫고 정당정치를 시작했다. 이번에 드디어 초선이 돼 배지를 단 박 의원은 민주당 역사상 최장수 비현역 출신 대변인을 역임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수많은 방송과 언론에서 이미 이름을 떨쳐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박 의원은 국회 내에서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뉴스포스트>는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 611호(박용진 의원실)에서 이제야 비로소 운전면허증이 생겨 감개무량하다며 국민께 감사를 전하고 기뻐하는 박 의원을 만났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16년간 한결 같이 지역 소통해 온 비결
민주당 최장수 비현역 대변인 진기록 써
아들 서른 살 때 물려주고픈 사회 있어

▲ 일찌감치 정치 현장에 뛰어들었다. 계기가 있나?

정치가 뭐냐고 물어보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본다. 변화시키는 걸 직업으로 하는 거라고 보는데, 정치를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92년 대통령 선거 때다. 한참 학생운동하고 있을 때다. 세상을 바꾸는 게 구호와 운동으로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당시 무소속 백기완 후보의 선거운동을 뛰면서 ‘국민들이 우릴 믿지 않는 구나’라고 느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22살짜리의 진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선거 때만 잠깐 나타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고민을 하다가, '평상시에 실천으로 보여줘야 하고 평상시에 사람들과 만나서 설득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신뢰를 쌓고 믿음을 쌓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게 정당구조라고 생각했다. 총학생회장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니까 97년이었다. 97년 대선 때 권영길 후보와 선거를 치렀다. 참담한 결과로 낙선한 뒤 권 대표가 창당할 인원을 찾고 있었다. 당시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민하던 찰나 권 대표가 먼저 제안해 시작하게 됐다. 일주일에 교통비 3만원 받고 신문배달하면서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29살 때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해 '박용진'이라는 이름을 걸고 첫 정치 행보를 시작하게 됐다. (세상을 만들려다 보니 정당을 만들게 됐다.)

▲ 권영길 전 의원은 박 의원에게 어떤 사람인가?

정치적 스승이다. 머릿속과 책속에만 있었던 진보적 사회를 직접 보고 온 사람이라 달랐던 것 같다. 그 분은 프랑스 파리에서 7~8년 가까이 언론사 특파원을 지내면서 그 사회를 들여다봤다. 거기서 프랑스의 진보사회를 보고 귀국하면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꾼 분이다. 그 전에는 ‘진보’라는 게 책상 위에서 논의의 대상이었지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탁상공론, 사자를 직접보고 온 사람은 사자를 그릴 줄 알았다. 갈귀를 허리춤에 그리는 사람이 있고 네 발이 그린 사람이 있었는데 직접 본 사람은 달랐다. 게다가 독일을 들여다본 정치적 보수주의자인 김종인 대표와 프랑스 사회를 공부하고 온 정책적 진보주의자인 권 대표가 둘이 통하더라. 굉장한 충격이었다.

▲ 국회의원 당선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감은?

감개무량 그 자체다. "내가 원래 정치할 타입이 아닌데 어쩌다 이걸 하고 있다"라는 말을 하는 정치인들을 제일 싫어한다. 국회의원은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저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이다. 학수고대했던 일이라서 저를 만들어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게 일종의 운전면허증 같은 거다. 버스운전기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까지 면허증이 없어서 못했다. 이제 제가 운전하는 버스에 온 국민들 다 태우고 '복지국가 대한민국'이라는 다음 정거장까지 잘 모시고 가고 싶다. 이런 기회가 생겼다는 거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 본보 이완재(좌) 편집국장이 8일 국회 의원회관 611호(박용진 의원실)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을 만나 그의 정치인생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사진=뉴스포스트)

▲ 종편 출연 등 바쁜 일정 속에서 지역구 관리는 어떻게 해왔나?

29살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해 왔다. 16년간은 똑같은 일을 해왔다. 지역 내 단체를 운영하신 분들은 저와 5~10번은 만나 악수를 하셨을 테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시는 지역민들께서도 제 명함 한 번 안 받아보신 분 없을 정도다. 활동하면서 걸었던 현수막만 몇 백장은 될 것이고, 유인물은 30만장 가까이 된다. 지역의 여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역민들과 운동본부를 만들어 조례 청원운동을 한다거나 고발운동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주민들과의 신뢰가 어느 순간 생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 민주당 최장수 대변인 기록을 갖고 있다?

중요한 건 민주당 역사 60년 동안 현역 국회의원이 아니거나 배지를 달아 보지 않은 사람이 당의 대변인을 맡은 게 딱 두 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4‧19 이후에 민주당 정부 들어서서 여당의 대변인을 맡았는데 당시 의원이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언급된다. 제가 알기로는 처음으로 현역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이 당 대변인을 맡은 사례다. 저는 2012년 3월부터 2015년 1월1일까지 했다. 2년 정도했다.

▲ 나름대로 비결이 있었을 것 같다?

대표가 9번 바뀌는 동안에 계속 있었으니까 둘 중 하나 아니겠나. 잘 맞춰드렸거나, 계파나 당내 갈등과 무관하게 내 할 일만 해서 그냥 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표가 바뀌어도 줄서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 2년 동안 대변인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가장 짧은 논평을 낸 적이 있다. 한 글자였다. "헐". 박근혜 대통령이 불통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이런 게 불통이면 자랑스러운 불통입니다"라고 마이크에 대고 말한 적이 있다. (할 말을 잃어) "헐", 한 글자로 논평을 냈다.

▲ 대변인을 다시 맡으라고 하면 의향이 있나?

맡지 않겠다.(미소) 국회의원으로서의 (입법) 역할에 충실할 계획이다.

▲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의 KBS보도개입 의혹에 대해서 어떤 생각인지.

배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시곤 국장과의 오래된 관계를 빼고, 청와대 홍보수석이 언론사 데스크에 대고 지시를 하는 게 일상적 업무인가. 이렇게 판단하면 안 된다고 본다. 물론 더 문제는 그러한 요구가 먹혔다는 거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데 옆에서든 뒤에서든 항의 전화가 들어오면 신경이 쓰인다. 하물며 위에서 내려온 건 항의가 아니라 엄청난 압력이라고 본다. 보도가 난 후에 펙트를 가지고 잘잘못을 따져야지, VIP(대통령)가 봤다고 편집권을 침해한 건 잘못한 거다. 이거는 부당한 압력이다. 과하게 가면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지난 8일 <뉴스포스트>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사진=뉴스포스트)

▲ 총 3번 만에 당선됐다. 지난 두 번의 선거 때와 분위기가 달랐나?

일단 당이 달랐기 때문에 번호가 달랐다. 처음 29세 젊은 나이에 출마했을 때도 7명 출마해서 13.3% 나온 걸 보면 나쁘지 않았다. 당을 만든 지 두 달 밖에 안됐었고, 이름도 모르는 민주노동당에서 나왔는데도 그 정도 득표했으면 아주 잘 나온 수치다. 그래서 더 기대를 부여해줬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 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이번에 유력 정당의 후보로 출마하니까 흔들림없이 지지를 보내주셨다. 9월부터 7번의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꾸준히 15~16%로 편차 없이 집계됐었다. 새누리당 후보도 4번 출마했던 사람이라, 두 후보를 지역민들이 빠삭하게 알고 계셨다. 평가도 이미 끝났고 선거 날만 기다렸던 거다.

▲ 16대, 18대, 20대에 출마했다. 공교롭게도 짝수 국회에만 출마한 이유가 있나?

17대에는 감옥을 다녀와서 선거권이 없었다. 19대 때는 민주통합당으로 들어와서 경선을 시켰는데, 영입인사 입장에서 경선은 당연히 실패였다.

▲ 정무위원회를 선택한 사연이 있나?

정무위가 피감기관으로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국무조정실 등이다. 서민들과 국민들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금융권, 경제계 대기업을 관리감독하는 기관, 우리나라 각 부처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책적인 충돌이나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 등을 하는 국무조정실 등을 상대하는 상임위다. 이들은 '서민'이라는 꼭지점이 있다. 여기를 대상으로 하는 상임위이기 때문에 우리 시장경제를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포용적으로 흘러가도록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택했다.

▲ 강북구을의 주요 현안은 무엇인가?

지역 개발문제가 중요하다. 베드타운이고, 산업경제기반 문화적 공간이 상당히 부족한 지역이다. 지역 전체적인 개발의 욕구들이 있는데, 문화와 복지, 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신설우이선, 동북선 등을 준비하고 있는데 교통의 사각지대에 있는 교통약자들을 위해 교통편의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 3번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아내의 내조가 남달랐을 것 같다.

없는 사람 취급해주니 고마웠다.(웃음) 아이들 키우는 게 굉장히 힘들 텐데 본인이 다 감내해주고 있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워낙 이해를 많이 해준다. 이번이 가져다준 국회의원 월급이 16년 만에 첫 월급이었다. 지난 번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는 답답해했는데 이번 당선됐을 때는 덤덤해하더라.

▲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바뀐 게 있다면.

100m 달리기 선수에서 42.195km를 뛰는 마라톤 선수로 체력이나 여러 모드를 전화하는 중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대변인이나 방송에서 보여진 정치평론가로서나, 당의 홍보위원장의 역할은 모두 장기투자전략을 세웠다기 보다는 단타매매였다. 100m달리기를 숨 가쁘게 뛰어왔다면 이제 42.195km 마라톤을 뛸 수 있는 체력과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으로의 모드를 전환하는 중이다.

▲ 앞으로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제가 5학년, 3학년짜리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이 아이 서른 살 때 어떤 사회였으면 좋겠는지 생각해보면 딱 답이 나온다.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해야 하는데 일자리가 없고, 계약직, 비정규직 일자리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뤄서 집을 얻기도 어려운 사회,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고, 아버지가 가난하면 아들에게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가 망조든 사회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사회가 치달아 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고려 말, 권문세가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고, 의무는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는 상황이 지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은 1000초에 가까운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고 다른 판단들을 해 나가고 있는데 우리국민들은 그런 기회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면 바뀌어야 하다고 생각한다. 한 축으로는 복지국가라는 방향으로 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 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따뜻하고 균형 잡힌 경제여야 모두에게 골고루 갈 수 있다. 국민들은 화려한 네온사인 밑에서 황폐화 돼가는 삶을 살고 있다. 저는 다음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해 나가려고 한다.

대담/이완재 편집국장
정리/설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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