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수로 버티는 가해기업, 구멍 난 제도에 우는 피해자

 

▲ 지난 9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과 참여연대는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 IFC 타워 앞 거리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피해자 측 옥시 일방적 최종배상안 거부
가피모 “검찰수사·국정조사 면피용 꼼수”
SK케미칼·애경 및 정부 관계자 책임론 부상
징벌적손해배상 등 제도개선 요구 확산

[뉴스포스트=최병춘 기자] 가습기 살균제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지 이미 수년이 지났다. 뒤늦게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지만 아직도 사태 해결까지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가습기 피해자의 눈으로 볼 때 정부는 여전히 미온적이고, 사태의 중심에 서있는 옥시는 꼼수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책임을 물어야할 일부 업체는 미꾸라지처럼 숨어버렸다. 더 이상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하지만 우리 법과 제도는 여전히 허술하다. 제대로 처벌하고 제도도 뜯어고쳐야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책임 회피 옥시, 퇴출돼야”

지난 9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이하 가피모), 그리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옥시레킷벤키저로 이름을 바꾼 옥시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 IFC 타워 앞 거리로 나섰다. 가습기 사태를 일으킨 옥시의 퇴출과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제2의 옥시를 막자’며 시민들로부터 서명을 받기 위해서다.

기자회견을 겸해 두 시간 남짓 진행된 이번 서명운동에 많은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름을 적으며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뒤늦게나마 검찰이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데 이어 지난달 국회에서는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 가습기 살균제 사태 해결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족들은 옥시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꼼수로 일관하고 있다며 태도에 분노하고 있다.

옥시가 지난달 31일 정부의 1, 2차 조사에서 1, 2 등급 판정을 받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 대한 최종 배상안을 발표한 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의 분노를 키웠다.

옥시는 피해자의 과거 치료비와 향후 치료비, 일실수입(다치거나 사망하지 않았을 경우 일을 해 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입) 등을 배상하고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를 성인 사망자의 경우 3억5000만원, 영유아 사망의 경우 최대 5억50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옥시는 이러한 안에 대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3차례 설명회를 열고 개별적인 의견을 수렴했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옥시는 이달부터 개별 피해자들을 찾아가 피해배상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 지난 9일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과 참여연대는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 IFC 타워 앞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러한 배상안의 기준이 된 것은 지난해 11월 정부가 정한 피해 기준이다. 당시 정부는 1·2차 조사에서 피해 인정 신청을 한 530명 중 221명은 폐질환과의 인과관계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를 4등급으로 나누고 인과관계가 높다고 인정된 1등급(거의 확실) 2등급(높음) 221명(사망 95명, 생존 126명)을 지급대상자로 규정했다. 나머지 309명은 3·4등급(가능성 낮음, 거의 없음) 판정을 내렸다. 옥시는 이같은 정부의 피해기준에 따라 배상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가피모는 옥시가 일방적으로 배상안을 내놓았다며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옥시의 최종배상안은 피해자단체들과 공식채널을 통해 마련된 안이 아니고 옥시가 일방적으로 판단해서 진행하고 옥시에게 가장 유리한 방안으로 탄생된 ‘기형적인 안’”이라며 “피해자단체들은 옥시가 의견을 수렴했다고 하는 입장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없고, 수용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또한 피해자들은 옥시의 배상안에 대해 1·2등급 피해자에 대해서만 배상하고 3·4등급 피해자는 언급이 없을 뿐더러 배상액은 유럽 수준보다 낮고, 국내 법조계의 의견과 견줘서도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만약 이 사건이 영국에서 벌어졌다면 개별적 피해배상 외에도 옥시 매출액의 10%인 1조8000억원 가량을 벌금으로 부담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대표는 “피해자의 고통과 옥시의 반인륜적 행태가 합의금에 묻혀 잊혀지지 않고 현재의 잘못이 시정돼야 한다”며 “검찰수사와 국정조사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배상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옥시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배상문제를 꺼내 들었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지난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 심리로 열린 신현우(68) 전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대표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 등에 대한 재판에서 신 전 대표 측은 “(가습기 살균제와 사망사건 간의) 인과관계가 과학적 증거에 의해 입증될 필요가 있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또 지난달 말 국회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위가 옥시에 대한 현장조사를 했지만, 옥시는 독성 실험결과에서의 은폐나 영국 본사의 개입 여부 등 대부분의 의혹을 부인했다.

특위는 옥시가 주요 쟁점에 대한 자료제출과 답변을 회피하는 등 조사에 불성실하게 임했다고 지적하며 추가 현장조사를 의결했다.

피해자 모임은 옥시가 최종배상안을 철회하는 한편 라케시 카푸어 영국 대표가 국회 청문회에 참석해 피해자와 국민에게 공식 사과하고, 거라브 제인 전 옥시 대표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도 국회·검찰의 소환에 성실히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배상 협상 대표도 한국이 아닌 영국 본사로 지정할 것을 요구했다.

▲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대표가 옥시의 배상안을 거부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뒤에 숨은 SK케미컬 등 가해 기업 나와라”

피해자모임은 옥시 뿐 아니라 이번 수사 대상에서 벗어난 가해 의심기업에 대한 처벌 또한 중요한 과제로 꼽고 있다. SK케미칼과 애경, 이마트 등이 그 대상이다.

현재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2011년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와 동물흡입실험 결과 위해성이 확인된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 ▲와이즐렉 가습기살균제(롯데마트 PB제품) ▲홈플러스 가습기청정제 ▲세퓨 가습기살균제 등 PHMG(폴리헥사메탈린 구아니딘 글로라이드)계열 용제 사용 제품으로 한정됐다.

이에 롯데마트에서는 영업본부장을 지낸 노병용 롯데물산 사장을, 홈플러스에서는 전 그로서리매입본부장 김원회씨와 전 법규관리팀장 이모씨가 구속돼 법정에 섰다.

반면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및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로 제조된 애경 ‘가습기 메이트’는 제외해 판정·지원과 검찰 수사에서 제외됐다.

이들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SK케미칼과 이를 판매한 애경, 이마트 등은 이번 사태서 제외됐다.

하지만 정부가 5월 구성한 가습기 살균제 폐 이외 영향 검토위원회(검토위)에서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 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도 폐 섬유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해물질로 인정됐다.

급기야 가습기 살균제 특위가 이들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에 나서면서 이들 기업에 대한 책임론이 다시 재부상 했다.

가습기 살균제 특위가 지난달 27일 옥시 서울 본사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하는 동시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SK케미칼 본사에 대한 조사도 실시했다. 또 특위는 서울 성수동 이마트와 서울 구로구 애경 본사도 찾아 가습기 살균제 유통과 판매조사를 진행했다.

SK케미칼에 대해선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가습기살균제의 원료를 만들어 공급하면서 일부 유해물질에 대한 보고를 누락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2년 SK케미칼이 가습기 살균제 원료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MIT, CMIT만 기입하고, 이들이 합성될 때 나오는 부산물인 디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DCMIT)을 기재에서 누락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SK 케미칼은 DCMIT의 경우 부산물이었기 때문에 보고서에 필수적으로 기재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또 PHMG, CMIT·MIT 등 유해성을 인지했는지에 대해 SK케미칼은 PHMG는 호흡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련 유해성은 조사하지 않았으며, CMIT·MIT에 대해선 비염 유발 등 부작용을 인지했지만 최소량만 제품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는 설명을 내놨다고 한다.

애경과 이마트의 현장조사에선 제품의 유해성에 대한 부실 관리 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으나 원료를 공급한 SK케미칼로부터 관련 자료를 제공받지 못했고 판매만 했다면서 과실 책임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위는 다음 달 22일∼26일, 4박5일 일정으로 옥시의 영국본사인 레킷벤키저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다음 달 말에는 청문회를 열고 사건 관계자들을 증인·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한다는 계획이다.

국회 특위가 시작되면서 이들 업체에 대한 수사요구 또한 거세지고 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가습기참사넷)는 8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전·현직 임원 20명을 업무상과실·중과실치사상 혐의로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을 제출했다.

고발 대상은 1997년부터 올해 3월까지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 등 3개 기업에서 대표이사를 역임했거나 재임 중인 인사들이다.

SK케미칼 최창원·김철 현 대표이사와 김창근·이인석 전 대표이사, 애경산업 고광현 현 대표이사와 장영신·채형석·최창활·안용찬 전 대표이사, 이마트 장재영·김해성 현 대표이사와 권국주·류한섭·지창렬·김진현·황경규·구학서·석강·이경상·정용진 전 대표이사 등이 포함됐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아직까지 해당 제품 피해자들이 저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데다 검찰이 한번 수사대상에서 제외해 이들이 수사 대상에 포함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국정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로 발견되고 있어 희망적”이라고 밝혔다.

“허술한 시스템·구멍난 제도 고쳐라”

가해기업 뿐 아니라 이를 관리해야할 정부에게도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피해자 모임은 “환경부를 비롯한 산업통상자원부·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 등 정부 부처의 과오와 책임도 명확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은 지난 5월 강현욱 전 환경부 장관(1996~1997년 재임)과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1999~2003년 재임) 등 정부 책임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이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사법처리보다는 진상 파악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검찰은 해당 부처 실무자나 중간급 담당자들을 불러 조사했고, 일부 부처는 책임자급인 고위 공무원을 소환조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 당시 규제에 대한 법규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아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투명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수사도 유사 사건 재발 방지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괜찮은 소식도 들린다. 검찰 일부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관리·감독 책임의 정점에 있는 환경부의 전직 장관들을 불러 조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피해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2의 가습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책임자 처벌과 함께 제도의 보완의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가피모는 잘못된 기업 활동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이른바 ‘옥시재발 방지법 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는 집단 소송법 제정, 징벌적 손배법 제정,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제정, 화학물질 관리법 개정, 살생물제 관리법 제정 등이 포함돼 있다.

강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계기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는 물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보다 강력한 형사처분제도까지 하루 빨리 도입해야한다”며 “특히 징벌적 손배제의 경우 가해기업들에게 소급 적용될 수 있도록 특별법으로 명문화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8일 가피모와 참여연대는 고의 또는 중과실로 생명·신체에 피해를 입힌 불법행위에 대해 징벌배상액의 법적 상한을 두지 않는 내용을 포함한 ‘징벌적 배상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청원했다.

한편, 시민단체와 함께 가습기 피해자와 가족 모임을 이끌어온 강 대표는 “개별 보상 시작되면서 이같은 상황을 피해자들이 모르는 채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도 어쩔 수 없이 있다”며 “지난 5년 대답이 없을 때 힘들었지 오히려 지금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만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태해결을 위한 행보를 해나간다 점에서 오히려 더 낫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강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올바른 피해 대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다시는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각오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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