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 마크 ‘속사포·원맨쇼·성대모사’...故 김형곤과 유머1번지 공전의 히트

데뷔 시절 코미디 ‘바보흉내.슬랩스틱’이 대세
낯선 사회풍자 개그로 신선한 반응 이끌어 내

故 구봉서, 데뷔 때 심사 영원한 스승이자 멘토

코미디언협회 늦은 출범 회원800명 복지 열악
프로덕션 중심 요즘 제작환경 생존경쟁 부추겨

지상파 방송 나가 정치 하이코미디 선보이고파
수준급 바둑 실력...이젠 유머강사로 전국 누벼

▲ 코미디언 엄용수.(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기자)

[뉴스포스트=인터뷰 진행 이완재.안옥희 기자]  “풍자 코미디는 당시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세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카타르시스의 창구였어요. 다른 데서 정부 욕하면 미친 놈 소릴 듣지만, 무대에서는 그것이 곧 작품이 되고 박수받을 수 있으니까요.” 코미디언 엄용수(63.사진)는 유신과 독재, 쿠데타로 얼룩진 70·80년대 서슬 퍼런 시국에서 남다른 저항의식을 가지고 데뷔했다.

정식 개그맨이 되기 전 대학축제와 행사 현장에서 MC로 풍자 코미디의 감을 익힌 그는 정부를 비판하고 재벌 횡포를 꼬집는 풍자로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본격적인 사회풍자 코미디를 선보이기 위해 개그맨이 됐지만, 당시 현실은 풍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언론통제·탄압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코미디가 자취를 감추고 코미디가 저질 콘텐츠로 호도되며, 코미디언들이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던 시절이었다. 근대화·산업화 달성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인권탄압으로 노동자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제 몸에 불을 댕기고 무고한 사람들은 간첩 누명을 쓴 채 즉결처분 사형에 처했다.

이처럼 엄혹한 시국에도 사회풍자는 존재했고 살아남았다. 불편부당한 세태를 풍자하며 웃음과 통쾌함을 주던 이들이 바로 코미디언들이다. 엄용수도 그중 하나였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는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라며,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80년대가 정치풍자·세태풍자 코미디의 르네상스 시대였던 것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80년대 정치풍자 코미디를 이끈 엄용수는 현재 (사)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회장,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 코미디지부장으로 재임하면서 방송뿐 아니라 지자체 웃음 특강 강사로도 맹활약 중이다. 최근에는 코미디계의 전설이자 대부인 고 구봉서 씨의 영면의 길에 상주로 나서 영결식 내내 식장을 지키는 모습이 전파를 타며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코미디언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시종 에너지 넘치는 입담과 성대모사로 특유의 개그감을 선보이며 왕년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세월을 피해갈 수 없었던 듯 어느덧 우리 나이 64세. 현대사를 관통해온 38년간의 코미디인생에 대한 소회와 웃음철학을 들어봤다.

 

80년대 불편부당 시기 저항의식에 개그맨 데뷔
풍자로 무소불위 권력층에 도전 카타르시스 느껴

-1979년부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개그맨이 된 계기가 있다면?

“그때 당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직업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돈을 벌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취직도 어렵고 마땅히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1979년에 TBC 동양방송에서 라디오 출연을 하고 있었는데 80년에 갑자기 TBC가 KBS로 통폐합되면서 없어져서 81년 MBC 개그맨 콘테스트를 통해 공식 데뷔를 하게 됐죠.”

-당시 시대적 상황은?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 다 같이 못 살던 시대니까 대학가 축제에서 정부 비판하고 재벌들 횡포를 꼬집고 풍자하면 통쾌하잖아요? 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론 통제하고 탄압하면서 정부 비판하는 코미디를 없애라고 해서 실제로 코미디가 방송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어요.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에서는 코미디가 저질 콘텐츠라고 호도하며, 배삼룡·이주일 등 일부 코미디언들의 방송 출연을 정지시켰죠.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였어요. 1세대 코미디언 배삼룡 선생의 경우 사업 부도를 냈다고 반사회적 인물이라며, 방송활동·밤무대·극장 등 모든 활동을 막은 거예요.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했죠.

이런 일들을 겪으며 활동했기 때문에 저항의식이 강했어요. 사회풍자 코미디를 하려고 데뷔했는데 전두환 정권 시기라서 풍자가 허용이 안됐어요. 풍자 코미디는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세력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카타르시스의 창구였어요. 다른데서 정부 욕하면 미친놈 소릴 듣지만, 무대에서는 그것이 곧 작품이 되고 박수받을 수 있으니까요.”

-올해로 코미디 인생 38년째다. 햇수로 38년 방송하며 ‘속사포의 달인’, ‘개그의 달인’, ‘MC 겸 원맨쇼의 달인’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나름의 소회가 있을 것 같다.

“굉장히 행복했고요. 아마 지금 데뷔했다면 개그맨 떨어졌을 거로 생각해요.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제가 데뷔할 때는 코미디 지망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또 저와 같은 스타일도 없었어요. 지원자 태반이 바보흉내, 슬랩스틱이었고요. 바보연기가 오래가고 남을 웃기기도 쉽다는 선입견이 있었죠. 그런 와중에 제가 학구적인 느낌을 주는 고상한 어휘를 쓰면서 정치풍자, 사회풍자를 보여주니까 그게 심사위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줬던 것 같아요. 그때는 방송사도 MBC·KBS 두 개밖에 없어서 방송에 나가면 국민의 50%가 내 코미디를 보게 됐던 시절이에요. 그러니 데뷔만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었죠. 라디오 하나만 출연해도 사람들이 제 이름을 다 기억하는 거예요. ‘개그맨’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정도로 아주 신선했고 개그맨이 20~30명에 불과했던 시절에 데뷔했던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어딜 가도 대접이 좋았는데 그건 선배 개그맨들이 터를 잘 닦아놨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 코미디계 거목, 구봉서 임종 지켜
“코미디언들의 아버지이자 스승·멘토·모니터요원”

▲ 현대사를 관통해온 38년간의 코미디인생에 대한 소회와 웃음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코미디언 엄용수.(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 기자)

-얼마 전 한국 코미디계의 큰 별 故 구봉서 선생이 영면에 드셨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생전 고인과 얽힌 일화를 공개한다면?

“제가 데뷔할 때 구봉서 선생님이 심사위원장이었어요. 당시 MBC 개그맨 콘테스트 1기를 직접 뽑으셨죠. 뽑힌 개그맨들에게 3개월 동안 방송이란 무엇인가, 방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교육하는데 그때 구 선생님 강의가 정말 30~40년 무대에서 쌓은 내공이 농축된 명강의였어요. 선생님 강의가 너무 좋아서 2기 교육 때도 강의를 또 들었어요. 그리고 구 선생님께는 20여 년간 음력설, 양력설, 추석에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어요. 후배들이랑 코미디언협회 직원들과 함께 용돈과 장수식품을 준비해서 원로 코미디언 선배님들을 한두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있어요. 지난 8월 초에도 찾아뵙고 ‘낭만콘서트 5080’ 공연에서 틀 동영상을 촬영했는데 이게 마지막 동영상이 됐어요.

지금 코미디언협회장과 노동조합(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 지부장을 맡고 있다 보니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코미디계 현안들도 논의하고 조언도 받았어요. 연예인 성추행이나 성희롱, 절도 등 특히 코미디계에서 사고가 나면 선생님께 전화가 와요. “그거 어떻게 된 거야?”하고 물으시고는 마치 제가 사고를 낸 것처럼 혼을 내셨죠. 또 집에 계시면서 코미디프로그램을 다 챙겨보시며 후배들 방송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언제나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항상 모든 코미디언에게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멘토, 큰형님, 모니터요원이었어요. 또한, 두 번의 이혼과 소송으로 제 가정사가 방송과 신문에 오르내릴 때도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어요.”

-지난 2010년부터 (사)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을 맡고 있는데 협회 설립 계기와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 (사)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 중인 왕년의 코미디언 이용근 씨는 엄용수 회장과 함께 실무 멤버로 협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기자)

“데뷔하고 보니 성우협회·탤런트협회·영화배우협회 등이 다 있고 40~7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코미디언들은 협회가 없어서 깜짝 놀랐어요. 왜 없을까? 의문이 생겼죠. 그래서 경조사를 챙기거나 위문공연 등 공익 위한 봉사를 위해 2010년 당시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 시절에 코미디언 협회를 만들었어요. 오랜 역사를 가진 다른 협회들보다 늦게 출범해서 현재 재정이 열악해요. 앞으로 재정을 많이 확보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주려고 해요. 협회 차원의 위문공연 등 노력봉사도 중요하지만, 봉사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회비가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800명 코미디언 가운데 실제 방송하는 사람은 불과 170~180여 명에 불과해요. 600명 넘는 사람들이 이미 실업자예요. 800명 중 400여 명 정도는 이미 코미디를 접고 다른 데로 갔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비를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코미디언들이 정말 많고 따라서 협회 재정도 열악하죠. 부대사업들을 잘 일궈서 코미디언들 복지를 위한 사업을 하는 게 우리 협회의 과제예요.”

-과거 다른 인터뷰에서 정치·시사풍자 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드러낸 바 있다.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치풍자 개그를 하다 보니까 저는 정치인 성대모사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개그트렌드가 바뀌어서 풍자보다는 단순하게 웃기는 ‘아재개그’가 대세죠. 아재개그는 사상·철학·정치풍자 다 머리 아프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웃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욕구를 충족시켜줘요. JTBC ‘썰전’ 같은 프로그램들을 보면 이제 토크쇼가 정치·사회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자니 카슨쇼’ 같은 프로그램들이 국내에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한 종편에서 개그맨들이 모여 정치 토크하는 프로그램을 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성사되면 코미디계에 신선한 혁명이 일어날 거예요. 가장 바람직한 건 지상파에서 나서서 정치 관련 하이코미디를 선보이는 거죠. 정치인들은 어떤 황당무계하고 어이없는 일 일어나면 “코미디 같은 발상”이라며, 코미디를 운운해요. 그런데 코미디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정치인들이 코미디 이야기 매일 하듯 우리도 정치 이야기를 해야죠.”


정치풍자로 한국 코미디 르네상스 이끌던 80년대
“가난했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 풍요롭던 시절”

-1986년에 방영된 KBS 2TV ‘유머일번지’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故 김형곤 씨 그리고 김학래 씨, 정명재 씨와 함께 시사개그를 선보였다. 시사풍자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탄생 비화는?

“‘유머1번지’ 원래 제목은 ‘젊은이의 토요일’이었어요. ‘유머1번지’는 재미 위주로 갔고 ‘젊은이의 토요일’은 주말을 재미있게 보내는 내용이었는데 그걸로 양이 안 차니까 정치풍자, 세태풍자로 갔죠. 정치나 세태풍자하면 정치권 반발이 심할 테니까 기업을 풍자대상으로 삼은 것이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였어요. 비룡그룹이라는 가상의 재벌그룹 이사회를 배경으로 사회 전반에 대해 풍자를 했죠. 어떻게 보면 모의국회와 비슷해요. 기업들의 행패, 갑질, 노동자 탄압을 빗대서 정치풍자를 한 거였어요.

세태풍자로 당시 시청자 반응은 좋았는데 그 코너로 인해 기업인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며 기업인들의 반발이 있었어요. 기업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나라 잘 살게 하려고 했는데 기업은 독재고 회장님은 횡포부리고 이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장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모습들이 너무 지나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코너를 내리기로 했는데 언론에서 왜 내리냐고 해서 다시 살아났어요. 그래서 아마 3년 이상 꽤 오래 방영됐던 것 같아요. 그때 유행어로 “잘 돼야 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저는 회장님을 위해서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었죠.”

-한국 코미디계의 르네상스로 불렸던 80년대를 추억한다면?

“그때는 출연료를 얼마 못 받던 시절이라 대학축제나 기업체 행사 등 외부행사를 병행해도 살아가기가 빠듯했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정치풍자를 이끌어간다는 사명감과 뿌듯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게임, 프로축구 같은 게 없어서 사람들이 볼 건 텔레비전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지금은 보고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 관심이 분산돼 어지간히 출연하면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해요. 채널도 막 100개, 200개씩 되니까요. 그러니 데뷔와 동시에 잊히는 경우가 허다하고 스타되기도 너무 힘들고요. 돌이켜보면 옛날엔 가난하고 힘들고 모든 것이 부족했었는데도 오히려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남아있는 개그 프로그램으로 KBS 개그콘서트·SBS 웃찾사, tvN 코미디빅리그 정도가 있다. 선배로서 요즘 코미디프로그램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옛날에는 코미디언이 100명이라고 하면 모두 안고 가는 ‘식구’로 여겨졌죠. PD가 연기자 고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것에 따라 배역을 줬어요. 배역 안배를 하고난 다음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교양 프로그램에라도 나가라고 다 끌어줬는데 지금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죠. 프로덕션에 의해 돌아가게 되면서 선배보다 이제는 자기네 사장이 최고인 거예요. 선후배 우애는 사라지고 연기자 간 치열한 생존 경쟁만 남았어요.

많은 출연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게 지금은 실력문제라기보다 이른바 ‘○○사단’ 등으로 대변되는 프로덕션의 파워문제가 됐어요. 함량 미달인 사람도 기획에 의해 출세할 수 있고 역으로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기획사 잘못 만나면 함몰되는 거죠. 다들 오직 자기 개런티·인기 높이기, 자기 입지 굳히기를 위해서만 행동해요. 옛날처럼 한솥밥 먹던 문화가 사라지니 데뷔해서 오래가는 개그맨이 정말 드물어요.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작비 문제예요. 100이라는 제작비가 있다고 가정하면 일류, 이류 등 인기연예인이 반드시 그 프로그램에 들어가야 해요. 그들이 개런티로 90을 요구하면 나머지 인기 없는 90%의 사람들이 남아있는 10을 가지고 나눠 먹어야 해요. 이런 승자독식의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대다수 인기 없는 90%는 가난하고 슬픈 삶을 면할 수 없어요. 그래서 노동조합 같은 게 필요한 겁니다.

정부에서 관련법을 만들어서 최저출연료를 보장해줘야 해요. 이 정도는 있어야 인간적인 연기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경제민주화가 안 되면 연기자 생활을 할 이유도 없고 오래 할 수도 없어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연기자들의 자살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일류 연예인뿐 아니라 방송계 사람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 함께 고심해봐야 해요.”

 

시민 대상 강연 ‘웃음치유사’로 활동 제2전성기 누려
“웃음이 곧 행복·국가경쟁력·건강” 웃음 복음 전파 중

▲ 지난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사)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사무실에서 엄용수 회장과 뉴스포스트 이완재 편집국장이 인터뷰를 진행했다.(사진=뉴스포스트 안옥희기자)

-지난 3월 이세돌-알파고 바둑 대결 중계를 할 정도로 연예계 바둑고수로 알려져 있다. 바둑의 매력을 꼽는다면?

“바둑은 아마추어 6단이에요. 그동안 코미디 쪽에서 일하느라 바둑을 잊고 살아왔는데 최근에 알파고가 나오면서 YTN·MBC에서 해설을 했어요. 그걸 계기로 바둑팬들이 제게 바둑프로그램에도 좀 나오라고 해서 지금 박상돈 8단과 함께 바둑전문채널에서 바둑방송을 하고 있어요. 요즘 유해 오락이 정말 많은데 바둑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주는 재미있는 국민생활체육이에요. 앞으로 바둑방속도 계속 하고 조만간 코미디언협회 이름으로 연예인바둑대회도 열 생각이에요.”

-평소 이용식 씨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안다. 이용식 씨 외에 평소 친분 있는 선후배는?

“이용식 씨 외 임하룡·김학래·정명재 이 사람들과 한 시대를 같이 했고요. 선배로는 전유성·장고운·김병조·강석 이런 분들이 있죠. 이분들이 다시 뭉쳐서 개그나 코미디프로그램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옛날 전성기를 함께 누렸던 기라성 같은 멤버들을 모아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전국의 많은 시설, 많은 어르신, 낙도·오지·해외 등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활성화 하고 싶어요. 코미디언협회가 지금하고 있는 ‘낭만콘서트 5080’처럼요.”

-지금은 방송 활동보다 시민 대상 웃음특강 강연자로 활발히 활동 중인데.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

“지금은 코미디 출연 수입보다 특강으로 얻는 수입이 더 많아요. 지방자치 시대가 되면서 전국 시군구, 읍면동에서 노인대학, 주부교실 등 엄청나게 많은 시청각실을 지었어요. 그러다보니 콘텐츠가 많이 필요해지고 강사 수요도 늘어나 제게까지 기회가 온 것 같아요. 앞으로 저뿐아니라 이런 코미디언 초빙 강의를 많이 만들어달라는 의미에서 제안이 들어오면 대부분 수락하고 전국 어디든 다니고 있어요. 코미디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죠. 강의에서는 “‘웃음’이 곧 행복이고 국가경쟁력이며, 건강이다”라는 말을 해요.”

-엄용수에게 있어 코미디, 웃음이란 무엇인가?

“웃음이란 나의 생명이죠. 또한, 웃음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기 재산이에요. 코미디언협회에 개그맨들이 입회 등록하러 오면 저는 먼저 “네가 말하면 사람들이 많이 웃니?”라고 물어봐요. 그래서 잘 못 웃긴다고 하면 “그럼 먼저 남의 말에 잘 웃어줘라”라고 말해요. 웃기는 사람과 웃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코미디가 되거든요. 카메라는 항상 웃기는 사람과 웃어주는 사람을 담기 때문에 잘 웃으면 어디서든 쫓겨날 일이 없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다른 개그맨 말할 때 잘 웃어주고 박수 잘 쳐주고 그다음에 웃겨라”라고 조언해요. 웃어주는 역할이 웃기는 것 이상으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앞으로 계획은?

“올해 코미디페스티벌도 열렸고 곳곳에서 코미디극장을 많이 짓고 있어요. 지역에서도 ‘웃음의 도시’, ‘웃음축제’ 등 웃음을 테마로 한 행사가 늘고 있어요. 이제까지 행사들은 특별한 특징 없이 그냥 무대공연 같은 거로 채워졌는데 코미디축제를 하면서 ‘웃고 살자’, ‘많이 웃자’ 이런 캠페인도 펼쳐지고 있어요. 요즘 코미디언들 행사 초빙 문의도 많이 늘었어요. 그만큼 코미디가 발전하고 있다는 방증이에요. 국회에서 정치인들 싸우고 갈등하는 것도 결국 웃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웃음치유사 개그맨들을 불러서 재밌는 특강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내년도 예산이 400조 정도 되는데 그중 1조 정도 개그맨들에게 주고 매일 한 시간씩 국회에서 특강하게 하면 정치인들이 멱살 잡고 단상 위로 올라가는 일 더는 안 생길 거예요.”

 

코미디언 엄용수는?

1953년 8월 8일 경기도 화성군 출생(만63세)
홍익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
현 (사)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 회장/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 코미디지부 지부장

- 1977년 연극배우로 데뷔, 1979년 TBC동양방송 개그콘테스트 통해 정식 데뷔
- KBS, MBC 개그콘테스트 입상
-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코미디 세상만사
- 아침마당,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6시 내고향
- 2010년 사단법인 대한민국 방송 (KBS·MBC·SBS) 코미디 협회 회장
- 응답하라 7080 토크콘서트
- 코미디 7080 빅쇼
- 2016년 YTN 이세돌 VS 알파고 대국 해설 外 다수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