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무지근하게 아랫배를 압박하던 통증은 사라질듯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골반을 압박했다. 며칠 전부터 두둑하게 부풀던 가슴의 멍울도 여전했다. 가슴께로 끌어올린 이불에도 그 무게가 느껴질 만큼이었다. 밤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따금 대숲을 흔드는 바람이 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냈고 그것에 맞춰 문풍지가 가쁘게 몸을 떨었다. 그 사이에도 엄마는 수시로 문을 열어 어둠 속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큰 눈이 올 조짐인디……”

아침 눈을 뜨자 엄마의 우려대로 세상은 온통 눈이었다. 검푸른 산들이 자취를 감춘 마을은 지붕마다 살찐 하얀 몸통으로 회색빛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함박눈이 오는 날의 아침 공기는 부드럽고도 달콤했다. 새하얀 솜사탕에 빠져버린 그것처럼.

능교 소재지에서 막차로 들어와 잠을 자고 나오는 버스는 평소보다 1시간이나 서둘러 산동네를 빠져나갔다. 눈에 갇혀 차가 나가지 못할 것을 걱정해 잠을 설치던 연의 부모도 그 첫차를 놓치지 않았다. S읍의 이모 결혼식은 아직도 이틀이나 남아있었는데. 폭설에 미리 앞질러 나간 두 사람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이제 집엔 연과 동생 찬이 뿐이었다.

한낮이 되어서도 눈은 조금도 누그러뜨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깜빡 잊고 모이를 주지 않은 닭장에서 닭들이 홰를 치며 울었다. 그래도 연은 방바닥에 배를 붙인 채 꼼짝을 못 했다. 생리였다. 첫 생리. 요 위로 도톰한 꽃잎 모양의 생리혈이 민망하게도 붉었다. 새벽녘 이불을 들치다 깜짝 놀라 잠을 설친 만큼 연의 초경(初經)은 상당히 늦게도 찾아왔다. 열아홉. 특별하게 성장발육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에 연은 반가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초저녁부터 허리를 조여오던 통증은 바로 그것에 대한 전조증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또다시 닭장 안의 닭들이 홰를 치며 울었다. 누가 저들을 낚아채기라도 하듯 날갯짓이 부산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개들만 사람의 기척을 잘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집안의 날짐승들도 외부의 기척에 민감한 건 똑같았다. 연은 그대로 아랫목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라디오 볼륨만을 줄였다.

처음엔 그 소리가 지나는 바람인 줄 알았다. 설경에 홀린 눈의 정령인 줄. 그래서 그를 보는 순간 숨이 멎었던 것인지도.

“아, 죄송합니다. 길을 찾다 그만…… 눈, 눈 때문에 길을 잃었습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짙은 가을날의 그것처럼 청명한 눈빛의 젊은 남자. 그 깊은 눈빛의 남자가 연을 보자마자 눈 때문에 길을 잃었다며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남의 집 마당 안에 들어와 길을 잃었다니. 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가 그 어떠한 말을 했어도 연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건 분명했다. 밤색의 점퍼에 까만 워크 캡을 눌러쓴 그의 얼굴은 부옇게 눈이 내리는 속에서도 가슴 떨린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으니.

“길을요?……”

“네, 아침나절 산을 내려올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가게에 물건 좀 사러 내려왔다가 그만.”

그러고 보니 남자의 손엔 세련됨에 어울리지 않게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그것이 길을 잃은 원인이라도 된다는 듯 남자는 연 앞에 봉지를 들어 올리며 또 한 번 계면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가 갓 소년기를 벗은 그것처럼 싱그러웠다. 그 싱그러움에 연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운암사로 가는 길을 찾으세요?”

종종 운암사엔 낯모르는 외지인들이 머물다 갔다. 짧게는 하룻저녁, 길게는 서너 달씩. 그도 그중에 한 사람이라는 걸 연이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 맞아요. 운암사예요! 아침에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눈이 쌓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아까 분명 이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런데 그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남자는 연의 물음에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미간을 좁혀 말했다. 다가선 남자의 콧날이 바위벽처럼 날렵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눈은 쉴 새 없이 쏟아져 그의 까만 워크 캡을 두툼하게 덮었다. 물론 그 때문에 그를 마루에 올라앉게 했던 건 아니었다.

“이쪽으로 돌아 쭉 올라가시면 되는데……”

연은 재빨리 마당으로 내려서 뒷마당을 가로지른 산을 가리켰다. 그 사이 아랫배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압력이 분출구를 확보한 그것답게 허벅지 사이를 뜨끈하게 적셨다. 젠장, 진정한 여성의 몸을 갖춘다는 건 부끄러움이 아닌데도 얼굴이 붉어졌다. 붉어진 얼굴빛을 감추려 재빨리 그에게서 거리를 떼고 얼굴을 돌렸다. 그때였다. 나긋하게 눈을 실어 내리던 바람이 장난이라도 치는 듯 연의 단발머리를 휙 쓸어 귀밑에 붙였다. 어린 사내아이처럼 천진하고 동그란 얼굴빛이었다.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켜는 나팔꽃과도 같은 풋풋함이기도 했다. 그 빛에 집 뒤로 걸음을 떼려던 남자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것을 알아챌 리 없는 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마루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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