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었다. 이런 심장의 광란은...'

“잠깐만요!”

남자가 다급하게 연을 불러 세웠다.

“실은 아까부터 발이 너무 시려서 그러는데, 자 잠깐만 몸을 좀 녹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

“발이 꽁꽁 얼어서 감각이 없어요. 이대로 산을 오르다가는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요.”

“헉, 무슨 말씀을, 지금 그쪽이 있잖아요!”

“아니, 내 말은……”

“걱정 마세요. 저 잠깐만 발만 녹이고 가겠습니다. 마침 여기 커피가 있는데 이것 한 잔 마시는 동안에 몸이 녹을 것 같아서요……”

남자는 들고 있던 까만 봉지를 연 앞에 들어 올리며 한껏 목을 움츠렸다.

“제게 뜨거운 물 한 잔만 갖다 주시면……”

“……”

“잠깐 발만 녹이고 가겠습니다.”

그래도 연은 망설였다.

“정말 잠시면 됩니다.”

연의 망설이는 빛에 남자의 눈빛은 더 간절해졌다.

“정 그러시면, 잠깐 이쪽으로…….”

그것이 남자를 마루에 올라앉게 했던 이유였다.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낯선 남자를 머물게 하는 건 난감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몸이 언 남자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거절하는 것은 더 민망할 일이었으니. 하지만 연이 주전자 뚜껑을 두 번씩이나 떨어뜨려 뜨거운 물 주전자를 남자에게로 내밀었던 것을 보면 이유치고는 석연찮은 이유이긴 했다. 그렇게 마루에 올라앉은 남자는 빠르게 손을 놀려 자신이 들고 온 검은 봉지 안에서 커피 병을 꺼내 들었다.

“감사합니다. 커피는 제가 탈게요.”

넉살과 달리 남자의 손가락이 파들거렸다. 그것에 연의 심장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회전 주기를 잊은 떠돌이 천체(天體)처럼. 심장이 제멋대로였다. 처음이었다. 이런 제멋대로인 심장의 광란은. 왜 그런 것일까? 낯선 그가 겁나는 것일까. 천만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깊은 눈빛 때문만도 아니었다. 사람을 압도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강압적이지 않은 부드러움이었다. 그랬다. 그는 마치 차디찬 얼음 잔 안에 든 감미로운 시럽처럼 끌리는 뭔가가 있었다.

“전, 윤서진이라고 합니다. 운암사엔 한 일주일쯤 되었고요, 집은 서울이고요.”

어쩌면 도시의 남자들이 다 그런 것인지. 우유 거품처럼 이물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좋아도 싫어도 말을 툭툭 던지는 산골 남자들의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매끄러웠다. 그렇다고 연이 그것을 내색할 숙맥은 아니었다. 연은 애써 시선을 앞산에 둔 채 그를 외면했다. 그깟 잠깐 앉았다 가는 남자의 이름을 알아 무엇에 쓰누? 그런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래야 자신의 울렁거리는 속내를 들키지 않을 것이었다. 앞산은 하얗게 쏟아지는 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 천지가 눈이었다.

“혹, 그쪽은 고등학생……?”

연의 시큰둥한 반응에 조금은 계면쩍은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던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에?”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연은 서진의 물음에 화들짝 표정만을 굳혔다.

“아직 학생인 듯 보이는데?”

“삼 학년요.”

“고 삼?”

“네.”
“아이고, 그럼 말 놔도 되겠네, 내 동생 놈도 고 삼인데, 이름은?”

서진은 연이 고 삼이라는 말에 대뜸 허리를 곧추세워 반말이었다. 그것도 제 동생이라도 보는 듯 지극히 편안한 표정으로. 젠장, 연이 그의 무례함에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나 그뿐, 이상하게 연은 그의 무례함마저 싫지 않은 떨림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름까지 밝히게 하지는 않았다. 서진이도 더는 연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런 산중에 학교는 어디에 있는 거지?”

“……”

“어디…… 이 산 너먼가?”

“……”

그래도 연이 말이 없자 서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버스로 통학해요. S읍까지.”

“아하 S읍! 그럼 지금은 방학이라……, 이곳 학생들은 방학엔 특별히 무엇을 하며 지내지?”

“……”

“와, 진짜 여긴 눈 많이 오네! 해마다 이러나?”

“……”

“태어나서 이런 눈은 처음이야……”

서진이 그렇게 연에게 말을 붙이려는 동안에도 눈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쏟아졌다. 그제야 서진이도 눈에 신경이 쓰이는 듯 미간을 좁혀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눈이야. 이렇게 계속 내리다가는 온 동네가 한겨울을 꼼짝없이 눈에 갇혀 버리겠어, 그나, 클 났다. 길이 이렇게 묻혀버렸으니……”

묵묵히 앉아있던 연이 그의 혼잣소리에 냉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루를 내려서며 그를 향해 낮게 말했다.

“그래도 지금 빨리 나서지 않으면 날이 어두워져 길 찾기가 더 힘들어져요. 여기에서 약 30분 쯤 올라가시면 거북모양의 바위굴이 보일 거예요. 그 굴을 끼고 왼편의 능선을 오르시면 전나무 숲이에요. 그 전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반대편 계곡을 타세요. 그럼 그 계곡이 끝나는 바위 틈 아래로 운암사가 보일 거예요.”

표정 없이 산을 가리키는 연의 말에 뒤따라 일어서던 서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금방 해가 져요. 금방 어둠이 온다고요.”

연은 그런 서진을 향해 재차 말했다. 정말 서진이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서진이 몸을 움직였다. 아니, 그는 걸음을 떼려다 말고 연을 향했다.

“저, 미안한데 거기까지만 그 바위굴이라고 한데요, 거기까지만 안내해주면……?”

“……?”

“워낙 내가 길치라 그리고 이런 폭설에 자칫 길이라도 잃으면……”

”……?”

“초행길이고, 더구나 이렇게 눈까지 쌓여서 좀 있으면 어두워진다면서요. 그러니 같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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