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고요 속에 연의 집 앞으로 까만 지프 한 대가 소리 없이 와 멈춰 섰다.

2

뒷마당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 동안 눈발은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한낮보다 거칠어져 나무를 베어낸 빈 공간에서는 부옇게 눈보라가 일었다. 멀리로 골이 사라진 크고 낮은 산들이 광대한 설원으로 다가섰다. 서진의 말대로 자칫하면 외지인이 길 잃기에 십상이었다. 연은 말 없는 눈빛으로 서진을 안내했다. 그런 틈에도 산새들은 잠자리를 찾느라 나뭇가지를 포로롱 오르내리며 부산스러웠다.

산 아래에서는 때 이른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도 보였다. 연은 그 모습에 문득 동생 찬이를 생각했다. ‘녀석이 종일 집을 비워두고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러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뒤따르던 서진이 연실 실실대는 웃음으로 연을 돌아보게 하는 통에 딴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그시 압박해오는 생리통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에 연은 좀체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은 그마저도 자유로워지고 말았다. 연을 뒤따르던 서진이 대뜸 앞으로 나서다 눈밭에 벌러덩 넘어졌던 것이니. 그 모습에 연은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을 시작으로 그들은 어린애들처럼 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으읔!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센 거야?”

눈을 뒤집어쓴 서진이 까르르 웃는 연의 얼굴에 눈덩이를 던지고 연이 다시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 차내자 서진이 다리를 펄쩍 뛰며 엄살이었다.

“크윽, 그러니까 누가 먼저 싸움을 걸래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방비 상태로 자유로워졌다.

“어 어어, 차갑다고요!”

이번엔 서진이 연을 붙잡아 그녀의 목덜미에 한 움큼의 눈을 집어넣자 연이 그 차가움에 몸을 비틀며 외쳤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그만 눈 위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장난기를 거둔 서진이 황급히 달려와 연을 일으키는 자세였다. 아니 서진은 그 자세를 버리고 그대로 또 한 움큼의 눈덩이를 쑤셔 넣고는 키득댔다.

“으 앗! 이건 반칙이야, 반칙이라고요!”

“후훗, 이름이 뭐지? 아까 말해주지 않았잖아, 이름이 뭐야?”

“아, 차갑다고요!”

“그러니까 빨리 말하라고, 이름이 뭐야?”

“으악, 그만, 그만!”

“이름을 말하라니까, 그럼 놔 줄게 크 큭.”

“연요, 황연.”

“향연?”

“뭐야, 향연이 아니고 황연이라고요!”
연은 서진이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에 그의 팔을 힘껏 꼬집어 뜯으며 외쳤다. 그제야 서진이 아파죽겠다는 시늉으로 연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 황연이라! 아주 예쁜 이름인데.”

“피, 연이 뭐가 예뻐요. 방금 그쪽이 말한 것처럼 잔칫상을 말하는 향연으로 들리는데.”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성대한 잔치면 좋은 거잖아.”

“뭐야, 남의 이름을 놓고……”

연은 서진이 긴장을 늦춘 틈을 타 잽싸게 서진의 허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그리고 자신의 급습으로 꼼짝 못 하는 서진에게 방금 그가 했던 그대로 목덜미를 들추고 커다란 눈덩이를 등 깊숙이 쑤셔 넣었다.

“앗, 차가!”

“크크 큭, 난 지고는 절대 못사는 성격이라고요!”

 

3

어둠이 짙어지자 눈 덮인 마을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그런 고요 속에 연의 집 앞으로 까만 지프 한 대가 소리 없이 와 멈춰 섰다. 어떻게 그 밤에 눈 덮인 산길을 넘어온 것인지. 체인을 감은 바퀴 아래에서 밤의 고요를 깨는 억센 쇳소리가 났다. 차에서 내린 건 사내 셋이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건장한 체격들이었다. 그들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곧바로 연의 집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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