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담배꽁초에서 DNA 결정적 증거 찾아

김응희 경감(사진=뉴스포스트)

1998년 대낮인 오후 1시,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집주인 A(당시 34세·여)씨가 괴한에게 결박된 채 성폭행을 당하고 목이 졸려 살해된 것이다. 그 처참한 광경을 신고한 건 A 씨의 어린 딸이었다. 당시 피해자의 10살의 아들과 11살이던 딸은 출동한 경찰 앞에서 망연자실 말을 잃고 한없이 울기만 했다. 경찰은 즉시 범인의 체액을 확보했다. 범인의 행적을 좆아 은행 현금인출기에 찍힌 사진도 찾아냈다. 범인이 A 씨의 남편 체크카드에서 151만 원을 인출했던 것이다.

채취한 범위의 혈액에서 AB형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년 전, 당시 유전자(DNA) 데이터베이스(DB)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금인출기에 찍힌 사진 역시 흑백으로 선명하지 못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내의 폐쇄회로(CC)TV도 없었다. 거리의 폐쇄회로(CC)TV도 없던 시절이었다. 강력팀 전체가 투입되어 수사본부가 꾸려진 도봉경찰서는 돌파구 없는 난항에 빠졌다.

당시 도봉경찰서 소속이었던 김응희 경감(당시 경장)도 현장에 투입되어 선배들의 수사를 거들었다. 그러나 소득 없는 수사본부 6개월이 속수무책 흘러갔다. 그 상황에서 당시 팀의 막내인 김응희 경감은 인근 경찰서로 발령이 나 자연스럽게 사건에서 멀어졌다. 그렇다고 김 경감이 그날의 사건 현장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다. A 씨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던 초등학생 어린 남매의 눈물과 절망의 영상이 가슴에 돌덩이로 얹힌 탓이었다. 그렇게 노원구의 살인사건은 수사본부 2년을 끝으로 미제사건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18년 전의 노원구의 살인사건이 다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김응희 경감의 불같은 집념이었다. 그간 서울청과 일선 경찰서를 두루 거치는 동안에도 그날의 사건 현장은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던 것이니. 아니, 그에게 18년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18년 내내 노원구의 용의자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서 치워내지 못했던 그였으니. 어디 그뿐인가. 그는 범인을 검거하는 꿈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날이면 더욱더 유족들에게 죄송스러워 종일 그의 마음은 불편했다.

그런 그에게 재수사 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온갖 강력사건을 전담하는 광역수사대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살인, 강도 성폭력 등 강력사건에 대해 서울 전역을 담당하는 광역 1팀에 배치된 그가 제일 먼저 손을 댄 건 18년 전의 노원구 살인사건이었다. 그는 DNA에 증거가 있다는 점을 주목했고 DNA 대조를 통해 범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결국 그와 그의 팀원은 각고의 투혼 끝에 지난 18일, 수사 5개월 만에 기어이 쾌거의 함성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28일 이 사건 해결의 공로로 1계급 특별승진(경위→경감) 임용된 김경감을 만나봤다.
 

18년의 숙원을 이뤄 낸 지금의 기분은 어떠한가?

솔직히 후련하다. 꽉 막힌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다. 그동안 그 사건은 내 가슴에 얹힌 돌덩이였다. 지금껏 그 노원구의 미제사건이 무척이도 날 불편하게 했다. 하루아침에 엄마의 비명횡사를 지켜본 그 어린 남매의 눈빛, 정말 그 눈빛이 잊혀 지지 않았다. 그 어린 남매의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난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래서 지금은 후련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척 죄송스런 마음이다. 좀 더 일찍 잡았어야 했는데. 그 돌아가신 분께 죄송스럽다. 그리고 고맙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분이 날 도왔다는 생각이다. 범인을 잡은 날이 지난 18일이다. 18년 전의 사건이 18일에 끝난 것이다. 범인을 잡고 나서 돌아가신 그분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물론 응답 없는 대화였지만.

미제사건으로 처리된 이 사건을 지금에야 재수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동안 난 서울청을 거쳐 일선을 주로 돌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재수사할 기회는 물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꼭 언젠가는 재수사 할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을 접은 적은 없었다. 그 염원 때문이었는지 작년 2월 광역수사대에 오게 되었다. 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18년 전 (DNA) 데이터베이스(DB)가 구축되지 못한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과학수사의 놀라운 발전도 재수사의 힘을 실어 주었고. 난 DNA 대조를 통해 범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 무엇보다 내게는 팀장님을 비롯해 우리 6명의 팀원이 있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모두 이 바닥의 굵직한 베테랑들이다. 그러니 내가 이 사건을 묻어둘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김응희 경감과 함께한 팀원들 왼쪽부터 최광몰 경장, 곽동규 경위, 김응희 경감, 오창근 경감, 박정훈 경위, 박충호 경사 (사진=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제공)

 

어떤 과정을 거쳐 재수사 했는가, 그리고 재수사 과정에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수사기법을 구체적으로 말하긴 곤란하다. 그러니 간단히 말하겠다. 난 당시 범인을 20대로 추정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20대라는 것은 추정일 뿐 확실치 않은 것이었다. 은행 (CC) TV의 화면이 흑백인 데다 워낙 흐릿했으니. 우린 수사 연령층을 좀 더 넓게 잡아 좁혀나가는 수사를 시작했다. 65년에서 75년생까지. 절도, 강도, 강간 성폭력 등 수사 선상에 오른 전과자들만 약 8000여 명이 되었다. 우린 그들을 순차적으로 압축해 들어갔다. (CC) TV의 얼굴을 대조했고 혈액형을 대조했다. 이렇게 점점 수사망을 좁혀 약 7000명 정도를 걸러냈다. 그리고 다시 125명으로 압축했다. 그 과정에 우리 팀원들은 전 지역의 지방출장과 교도소를 훑었다. 그런데 정작 범인 오씨는 수사 초기에 우리의 수사망에서 배제되었다. 그에게 절도 전과는 있었지만 강간, 성폭행 전과가 나타나지 않은 탓이었다. 난감했다. 그래도 난 나의 수사의 감을 믿었다. 그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나만의 감이었다. 계속적으로 오씨의 곁가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그가 범인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에 난 그의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에 잠복근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잠복근무 끝에 우린 마침내 그가 버린 담배꽁초를 확보했고 그의 DNA를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요즘 TV에 시그널이란 드라마가 있다. 형사들이 1999년 미제사건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를 무전기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장면이 압도적이다. 이 드라마의 내용처럼 지금의 내가 18년 전 그때의 나에게 무전(전화)을 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난 드라마를 안 본다. 솔직히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 드라마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 막내였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말을 한다면 참 잘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맙다고. 네가 끝까지 약속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지금껏 난 누구에게도 이런 말은 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난 그때 그 어린 남매의 눈물을 보며 나 스스로와 약속을 했었다. 꼭 놈을 잡고 말겠다고, 꼭 놈을 잡아 저 어린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주겠다고. 그 약속을 지켜준 그때의 막내가 고맙다.

우리나라 경찰관의 처우 또는 대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는가

우선 처우 개선에 앞서 국민이 우리 경찰을 좀 더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역시도 국민들과 가까이 가는 것에 더욱 노력할 것이고, 또 실질적으로 경찰은 국민의 친근한 벗으로 인권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울러 정부는 우리 경찰의 운신의 폭을 좀 더 넓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일을 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게 현실이다. 그 때문에 사건 처리가 신속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어느 정도는 경찰의 위상을 높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응희 경감 (사진=뉴스포스트)

평소 신조는 무엇인가

신조랄 것까지는 없다. 그저 무슨 일을 하든 즐겁게 하자는 게 내 신조다. 특히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욱 즐겨보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때문인지 아직 내 일에 그 어떤 회의를 느끼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밤샘 잠복근무에도 이 일을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난 그렇게 나 스스로를 컨트롤(control)하고 있다.

 

가정에서의 남편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한가

글쎄다. 솔직히 아내에게서 후한 점수는 받지 못하는 남편이다. 그렇지만 내 아내는 내가 직장에 충실한 것만큼은 인정 해준다. 나는 그것이 고맙고 미안하다. 경찰생활 20여 년이 넘는 지금까지 아내는 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은 힘이 되어준다. 그런데 난 경상도 남자라 말주변이 없다. 어쨌든 고맙다. 그리고 우리 세 딸, 그 녀석들이 정말 이쁘게 잘 자라주어 감사하다. 그리고 시골에 계시는 우리 노모, 94세이신데 아직은 건강하시다. 그것 역시 감사하다. 이번 일이 끝나고 전화 드렸더니 많이 좋아하셨다.

 

경찰이 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가

난 대학 때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 나 정도면 경찰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당시 우리 체육과 선배들이 많이 경찰에 입문해 있었고, 선배들의 활약을 보며 참 매력 있는 직업이라 생각했다.

 

경찰관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 언제인가

지금이다. 지금껏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을 다뤄왔다. 그때마다 보람도 있었고, 일의 자부심도 있었고, 또 그 어떤 인간적인 아픔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후련함을 느낀 적은 솔직히 없었다. 유족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나 스스로와 약속을 지킨 이 일에 난 매우 흡족하다. 아마도 이 기분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광역수사대는 그 어떤 부서보다 바쁜 것으로 안다. 그 소중한 여유의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보내는가

그렇다. 여기는 따로 휴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 주말이며 명절도 없다. 오히려 그런 날이 우리에게는 더 바쁜 날이다. 사건이 들어오면 그 사건이 처리되어야만 잠깐의 여유를 갖는다. 그런데 사건은 끊임없이 들어온다. 잠깐잠깐 생기는 여유에는 주로 운동을 한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우리 팀원 대부분이 그렇고 다들 운동으로 다져진 몸들이다.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은 없다. 난 내게 맡겨진 이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또 그렇게 노력할 것이다. 아울러 다정다감한 경찰로서 국민에게 인정받는 경찰로 남는 게 포부라면 포부다. 그리고 이 자리를 통해서 그 누구도 죄를 짓고는 우리 경찰의 눈을 절대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솔직히 80년대 90년대는 심심치 않은 미제사건이 우리 경찰을 많이 위축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수사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각 개인이 가진 경찰의 수사능력은 무서울 만큼 성장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우리의 눈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