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사내들이 소리 없이 창문 아래를 지나는 동안 연은 낮에 서진과의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눈사람이 되어 호탕하게 웃던 서진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그려져 잠은 아예 저만치였다. 햇살 좋은 날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런 것처럼 가슴이 붕붕 차올랐다. 허리를 압박하던 생리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경과 함께 찾아온 서진. 얼굴에 와 닿던 그의 감촉이 생리혈을 처음 보던 새벽녘처럼 아찔하기조차 했다.

뭔가 운명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와 겨우 1시간 남짓 동행했을 뿐인데. 아, 그를 또다시 볼 수 있을까? 연은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환한 표정으로 방안을 빙글 돌아 이불 위로 벌렁 누웠다. 미처 생각 없이 자신이 그를 다시 볼 기회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진은 연의 안내로 바위굴에서 왼쪽의 계곡이 보이자 서둘러 연을 돌려세웠다. 연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서진은 무모하진 않았던 것이다.

“숙녀를 이런 눈길에 혼자 돌려보내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닌데, 내가 지금 갈 길이 머니…… 안녕 귀여운 아가씨. 오늘 진짜 고마웠어.”

연의 작고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말하는 그의 눈빛에 아쉬운 빛이 가득했다. 연은 살짝 볼우물을 짓는 웃음으로 부드럽고 깊은 서진의 눈빛을 외면했다. 그것에 서진은 연의 어깨에 쌓인 눈을 쓸어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연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서진의 팔을 잡아 그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두른 붉은색의 머플러를 풀어 서진의 목에 감았다.

“어, 괜찮은데!”

“추워요, 난 조금만 가면 집이잖아요. 운암사는 아직 한참 올라가야 해요”

“어, 그래도 안 돼, 연이 추워서 안 돼!”

“전 괜찮다고요. 그리고 그냥 드리는 것 아녜요. 담에 돌려주세요.”

4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서진은 오전 내내 붉은색의 머플러를 들여다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이 머플러 주인이 바로 그녀인 것일까? 아니, 내가 언제 그녀를 만났기나 했던 것일까? 대체 그녀와 나는 어떤 사이였던 것일까?

정확히 언제부턴지? 붉은 머플러 안에 조각 그림처럼 떠오르는 소녀의 영상에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던 커다란 눈, 하얗게 덧니를 드러내던 상큼한 웃음.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게 소녀의 영상은 또렷했다.

그녀와 함께 펼쳐지던 하얀 설원도 분명 낯설지 않았다. 엄청난 폭설이었다. 그 안에서 소녀의 환한 웃음이 온산을 가득 메아리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서진은 오늘도 거기에서 생각을 접었다. 언젠가는 그 기억이 돌아올 거라는 믿음에 그는 애써 생각을 접어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아침나절 잠깐 흩뿌려지다 만 눈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몇 잎 남지 않은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파르르 요동을 쳤다. 맞은편 회색빛 빌딩 숲 사이로 비둘기 한 쌍이 내리는 눈발을 뚫고 높이 날아오르다 급히 앞을 다투어 내려앉았다. 그것들이 내려앉은 여의도 공원은 부드러운 생크림을 얹은 듯 도톰해져 가고 있었다.

한여름 풍성하게 잎사귀를 매달은 측백나무와 그 옆으로 낭창한 가지를 내려뜨린 갯버들도 그 형태를 잃어갔다. 첫눈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눈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사람들은 공원의 트랙을 돌았다. 발의 보폭과는 상관없이 앞뒤로 팔을 높게 휘둘러 돌격대원처럼 격하게 걷는 여자. 팔의 흔들림은커녕 상체의 움직임도 없이 얌전하게 엉덩이만 실룩이는 여자. 구부정한 자세로 아예 뒤로 걷는 남자.

그 때문에 남자는 뒤를 확인하느라 빨리 걷지를 못하고 두 팔을 머리 위까지 치켜 걷는 여자와 부딪칠 뻔했다. 서진은 창밖의 그들의 모습을 슬쩍 미소를 짓고는 창가에서 몸을 떼었다. 병원에 예약해놓은 시간이 다가오지만, 선뜻 내키지 않아 아까부터 망설이는 것이었다. 솔직히 진작부터 그것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오늘은 눈까지 내리니 더욱더 고민스러워졌다.

오늘은 차라리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겨울의 정취에 취해보는 것이 기억을 되찾는 것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책상 옆으로 마호가니 삼단 서랍장 안의 붉은 머플러를 꺼내 목에 둘렀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다 그때의 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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