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그 해 봄

5

1980년 그해 봄, 서진의 마지막 학기였다. 그 마지막 학기를 두고 서울은 대학마다 휴교령이 떨어져 귀신이라도 출몰할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계절은 봄이라 꽃들이 다투듯 피어나 매일같이 터지는 최류탄을 잘도 견디어냈다. 하지만 그것을 봄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매일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서진은 그들을 선동하는 요주의 인물로 쫓기는 신세였다. 경영학과 김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광주의 자신의 외가로 피신을 제의했을 때 서진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니, 그를 따라나선 광주는 오히려 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폭압(暴壓)으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지. 시민들은 셀 수 없이 죽어 나갔다. 모두 성별 나이를 불문한 이 땅의 민초들이었다. 서진이 그런 치열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승려(僧侶) 덕분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부리부리한 매의 눈을 연상케 하는 노승(老僧).

“빨리 타게!”

돼지를 실은 덤프트럭이었다. 질컥대는 오물과 코를 뚫는 냄새에서 서진이 안도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트럭이 시내를 벗어나는 동안에도 몇 번인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차가 세워졌다. 시내를 벗어나 농로에서도 군인들은 트럭의 휘장을 들추고 긴 총대를 휘둘러 돼지들을 훠이훠이 헤쳐 냈다. 그러나 그 안의 서진을 발견하지는 못 했다. 돼지를 실은 트럭은 광주를 벗어나고서도 두어 시간을 더 달려 깊은 산 중턱에서 그 노승을 먼저 내려놓았다. 서진이도 황급히 그를 따라 내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디에 계시는 분인지……”

그러나 그는 서진의 깊은 인사에 무표정으로 손을 내저었을 뿐. 그런 그가 몇 발자국 떼다 말고 누런 종잇장 하나를 서진의 손에 쥐여 주며 낮게 말했다.

“몸조심해서 잘 올라가게, 그리고 혹 불미한 일이 생기면 이리로……”

그러고는 총총히 산그늘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서진도 그 길로 무사히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서진은 수배령으로 또다시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그 좁혀오는 위기감 속에 문득 생각이 난건 그때 만난 노승이었다.

 

6

남쪽의 깊은 골짜기를 찾던 날은 초겨울답지 않게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산골사람들은 늦은 가을걷이에 바빠 길을 묻는 낯선 이에게 관심 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쫓기는 서진에겐 다행이었다.

서진이 찾은 사찰은 철옹성처럼 완벽했다. 묘사력 좋은 작가가 꾸며낸 무협지의 협곡처럼 사찰 주위로 빼곡한 침엽수림과 깎아지른 바위였다. 그래서 그것들의 호위에 계곡 깊숙이 들어앉은 사찰은 세상의 것이 아닌 양 마냥 평온했다. 대웅전 건너편의 깎아지른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폭포 역시도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서진은 그 속에서 죽은 듯 겨울을 보낼 생각이었다. 헌데, 사람이 긴장이 풀리면 그런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아니, 그놈의 눈 때문이었다. 눈이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한순간에 얼간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사찰에 몸을 숨긴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이 천지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눈송이들이 그처럼 하늘을 덮는 모습에 서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기조차 했다. 그것이 깊은 수면 아래에 있는 뭔가를 불러내는 것처럼 서진 자신도 모르게 절을 나와 산길을 걸었다. 주춤주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을 때 서진은 산을 내려와 마을의 작은 우체국이었다. 더구나 서진이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상태였다. 황당했다. 쫓기는 신세에 전화라니. 서진은 부랴부랴 오던 길을 되짚었다. 그 사이에도 눈은 사정없이 쏟아져 시야를 부옇게 가렸다. 그런 상황에도 서진은 불현 듯 커피향이 그리워졌다. 마을을 거의 벗어나는 지점에 하필 가게의 창에 진열된 커피 병이 보였던 것이니. 서진은 그곳에서 커피 한 통을 사 들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그때 서진은 곧바로 산으로 오르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산으로 오르기 전 어딘가에 머물렀던 게. 그렇지 않다면 그 같은 영상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일 뿐. 그날 그 이후의 일은 그 어떤 것도 서진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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