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머플러

안타깝게도 서진은 부분기억상실증이었다. 딱 그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1980년 그 겨울의 그 시점. 혹독한 고문에 1980년 그 겨울의 한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 그날 밤, 눈 쌓인 어둠을 뚫고 득달같이 달려온 군홧발에 그 어떤 반격도 못 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사실도 서진은 가족을 통해서야 알게 된 것이었고 단편적이나마 소녀의 영상을 떠올리게 된 것도 어머니가 보여준 붉은 머플러 덕분이었다.

“니가 그날 이것을 그놈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올이 다 풀려나갔지 뭐냐,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네가 뭔가 기억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내가 얼마 전에야 했구나. 참으로 미련하게……?”

그때 서진은 어머니가 비명을 터트릴 만큼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머플러를 보던 서진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싸안고 괴로운 숨을 몰아쉬었던 것이니. 서진은 그 순간 자신의 가슴으로 성큼 뛰어드는 뭔가에 숨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 이슬에 기지개를 켜는 풀잎의 청초함 같은. 간지럽고 부드러운 동화 속의 달콤함 같은.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찢겨 나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에 혼란스러워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도 서진은 종종 같은 감정에 휩싸여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에도 한 소녀의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그날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도심이 눈에 쌓여 깊은 겨울 풍경을 그려내는 아침이었다. 그때 서진은 무심코 창 너머로 눈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맞은편 건물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왁자하게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 중 한 여자애가 눈을 뭉쳐 던지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 모습이 특별할 게 없는데도 서진은 한참이나 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때 한 여자애가 날아오는 눈을 피해 달아나다 목에 두른 머플러를 땅에 떨어트렸다. 순간, 서진은 감전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붉은 머플러 위에 소녀의 얼굴이었다. 창밖의 보이는 여자가 아닌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낯설지 않은 소녀. 그녀가 서진을 향해 환한 웃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진의 머리가 조여와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병원으로 가는 대신 잠시 도심을 벗어날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휴대폰의 메신저 음이 울렸다. 폭설 주의보를 알리는 기상청의 메시지였다. 1980년 이후로 대단한 폭설이 예상된다는 메시지였다. 1980년 이후로 내리는 폭설, 서진은 그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다 허걱, 숨을 들이켰다. 놀랍게도 하얀 눈에 가지를 휘청 내려뜨린 소나무들이었다.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 아하, 황연!

 

7

생리가 시작되는 날이면 연은 이상하게 초조했다. 그래서 그런 날이면 자꾸만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해 겨울, 서진을 보던 그날 이후로 생긴 습관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서진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는 눈의 정령이었던 게 분명했다. 폭설이 눈의 정령을 불러들였던 게.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해, 연 사흘째 쏟아지는 폭설에 연의 부모는 집을 떠난 지 닷새째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도 그 눈이 녹기 전 폭설은 또 한 차례 산마을을 덮었다. 그 때문에 연이 운암사를 찾은 건 그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운암사는 휑했다. 법당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만이 겨울 석양빛에 저 홀로 지친 울음을 울고 있었을 뿐. 안타깝게도 서진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운암사 주지승도 겨울을 피해 산을 내려갔는지 절벽의 얼음장 밑으로 물소리만 을씨년스러웠다. 그것이 1980년 연의 초경과 함께 찾아온 겨울의 모습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싸한 바람의 냄새였다. 한바탕 눈이 쏟아질 기세였다. 김장배추를 뽑아낸 들녘이 노인의 알몸처럼 스산했다. 멀리 운암사로 오르는 길도 황량하긴 마찬가지였다. 겨울의 길목에 선 세상이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다. 3층의 책상 너머로 이 같은 풍경을 내다보던 연은 그 스산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아, 금방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야.” 구석 자리의 사환 아이가 그 소리에 엎드려 있던 몸을 들고 뚱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퇴근 시간을 넘기고도 여태 나가지 않는 그녀가 불만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왜?”

“벌써들 퇴근하셨는데요. 과장님만 남으셨어요.”

“어머, 그래! 그런데 왜 여태 안가고? 아! 미안, 금방 나갈 거야. 아니, 먼저 나갈래?”

연은 자신 때문에 퇴근하지 못한 아이를 보내놓고도 그대로 턱을 고인 채 책상을 지켰다. 꼭 이맘쯤이면 생기는 병. 달거리를 하는 그것처럼 매년 이맘쯤이면 손 하나 까딱이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 그녀의 전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눈이라도 쏟아지면 카페인을 잔뜩 섭취한 그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함은 더할 것이었다. 불면증이 생기는 때도 이맘쯤이었다. 겨울이면 꼭 한번은 겪어내야 하는 질긴 가슴앓이. 바짝 치솟은 열기에 한 사흘 창가를 서성이다가도 그럭저럭 애써 털고 일어나는 감기 같은 병. 폭설과 함께 찾아왔던 그 남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연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옛 추억에 갇혀 산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도시생활 20여 년을 뒤로하고 친정 식구도 없는 이곳의 면사무소를 희망한 연도 그런 것이었으니. 그러나 고향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서진과 함께 올랐던 운암사 골짜기는 널찍한 포장도로로, 연의 옛집 역시 아베크족을 손짓하는 찻집으로. 산천이 어찌 한 자도 안 되는 사람의 마음보다 그리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연을 기억하는 이도 이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으로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눈 속에 신작로의 가로등 빛이 마치 물 위에 뜬 연꽃처럼 그윽했다. 멀리 신작로 너머 운암사 오르막도 가로등으로 홍안의 부드러운 빛이었다. 연은 그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다 창가에서 몸을 떼었다. 마치 물 위를 유영하듯 천천히.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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