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처럼 폭설이 내렸다

눈이 내리는 신작로 위에서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도로를 내려서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코트 깃을 여미던 연이 그 모습에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연의 표정, 연의 멈춰버린 숨, 다음은 반사적인 몸짓이었다. 연이 문을 박차고 3층의 비상계단 위에 서는 것과 동시에 계단 아래로 승용차가 멈춰 섰다.

“저,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좀 찾을까 해서요?”

창이 열리고 차 안의 남자 목소리였다.

“……?”

“예전에 이 마을 운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집이 한 채가 있었는데요. 약 25년 전 쯤요. 혹 그곳에 살던 분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해서요?

“……?”

“황연 씨라고요?”

“……!”

분명 꿈은 아니었다. 방금까지도 연을 창가에 잡아 묶어 둔 남자.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어도. 연이 그의 목소릴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혹시, 운암사가 이 동네가 말고 어디 또 있는 건가요?”

남자는 창밖으로 얼굴을 길게 빼고는 재차 물었다. 아찔한 현기증에 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래서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연의 묵묵부답에 남자는 성큼 차에서 내려섰다. 남자의 얼굴선과 콧날이 그리고 그 부드럽게 흐르는 그 뭔가가 연 앞으로 성큼 거리를 좁혔다. 아, 서진! 분명 서진이었다. 세월이 흘러 조금은 풍성해진 몸체에 턱선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연의 기억에 남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연은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즉시 그에게 몸을 날렸다. 아니,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연은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제 기억엔 분명 이 동네가 맞는데, 이 동네 분들은 다들 잘 모른다고 하시고, 마침 면사무소에 불이 켜져 있기에……, 담당이 아니시더라도 좀 찾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서진은 연의 세차게 떨리는 숨을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연의 모습에 남자는 금방이라도 계단을 오를 자세로 물었다. 그것에 연은 자신도 모르게 코트 깃에 얼굴을 묻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서진이 계단에서 발을 떼고는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연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것에 연은 재빨리 서진을 향해 움직였다. ‘오 서진, 당신이 맞는군요. 왜 이제야……그래요 제가 연이에요.……’ 그러나 몸이 사정없이 후들거릴 뿐 한발도 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잃은 말들이 연의 안에서만 아우성 쳤다. 안타깝게도 서진은 연을 잠시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한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와 돌아서는 서진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어 장난이라도 치듯 그의 목에 두른 머플러 자락을 뒤로 잡아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지 못한 서진은 그대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건물 맞은편 신작로 위에서 누군가 면사무소를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연의 아들 무영이었다. 녀석이 조금 전 서진의 승용차가 내려선 신작로에서 연을 향해 팔을 한번 번쩍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뒤를 바짝 따른 남편이 무영이와 마찬가지로 손을 휘둘러댔다. 연의 퇴근이 평소보다 늦는 것에 그들이 평소 하지 않던 마중이었다. 그 순간, 왜 그랬을까. 젠장, 왜 그랬을까. 남편이 서진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닐 텐데, 왜, 왜.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분들 오래전에 이사하셨는데요.”

연이 서진에게 속사포처럼 쏘아댄 말이었다.

“네?

차 문을 열려던 서진이 깜짝 몸을 돌려 물었다.

“이사했다고요. 아주 오래전에.”

연은 다시 말했다.

“이사요? 그럼, 이 동네가 맞긴 맞는군요. 이름은 연이고요 황연……”

“그건 잘 몰라요. 어쨌거나 이제 이 동네 황 씨 성을 가진 분은 없어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서진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연이었어요. 이렇게 내리는 눈처럼 차갑고 순정한 아가씨였어요.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여기에 없다고요? 하긴, 그래요. 세월이 얼만데요. 그 세월이……그렇죠. 그 세월이 얼마라고요. 흐 허허허.”

그 허탈한 웃음에 연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서진이 고개를 떨어뜨려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 사이 남편과 무영은 신작로를 내려서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진이도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서진은 연의 남편과 무영이 걸어오는 주차장을 마주해 신작로로 올라섰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연이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 서진을 뒤쫓았다.

“잠깐만요! 잠깐만, 내가 연이에요! 나라고요! 내가 황연이라고요!”

그러나 서진은 가로등이 줄을 이은 동네 앞을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렸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그를 보게 된 시간이. 서진이 사라진 모퉁이의 어둠이 싸한 아픔으로 밀려왔다. 그 먹먹함에 연은 애써 뜨거움을 삼키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굵어진 눈은 저만치의 서진이 떨구고 간 핏빛의 머플러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연은 머플러를 주워들다가 풀썩 허리를 접었다. 놀랍게도 25년 전, 서진의 목에 감아 준 자신의 붉은 머플러였던 것이다. ‘아, 지금껏 이것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바보, 나라고요, 나! 지금 당신이 찾고 있는 연이라고요. 아무리 어둡기로, 아니, 이깟 코트 깃에 얼굴을 가렸다고, 난 달려오는 차만 보고도 당신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는데…… 흑.’ 언제 도착했는지 아들 무영이 머플러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연의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엄마, 넘어진 거예요?”

무영의 걱정스러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의 목소리였다.

“왜, 무슨 일 있어요?”

그래도 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픈 신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한참 후 허리를 접은 그대로 깊은 숨으로 말했다.

“배가 아파서, 갑자기 배가 좀 아파서, 그러니 잠깐만 이대로요. 흑,”

정말 배에 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생리가 시작될 그것처럼 골반과 허리를 지그시 옥죄는 통증이 연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어둠 속에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그때처럼 폭설이 내릴지도 몰랐다. 서진이 왔던 1980년 그해 겨울처럼.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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