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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지 연재소설] 낮달 ①첫 만남

오늘 문득 S, 너의 소식이 궁금해졌어, 잘 지내고 있겠지? 아니, 실은 난 지금 누군가와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네가 불현듯 생각이 난 건지도.

그러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누군가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몰라. 바람이 불어도, 음악을 듣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무심코 생각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런 사람. 지금 내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S, 넌 이해해 줄 수 있겠니?

한낮에 설핏 내리뜬 낮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바람에 우수수 지고 있는 은행잎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고. 해를 비켜선 야윈 낮달 아래로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거든. 온통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을 학생들이 차박차박 밟아 걸으며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어. 그때 교문을 통과해 내 앞을 걷던 아이 하나가 허리를 굽혀 은행잎을 줍더구나,

제법 키가 큰 남자아이였어. 교복 아래로 체크무늬 카디건이 슬며시 엉덩이를 덮는 나름 멋스럽게 보이는 녀석이었어. 그 녀석이 은행잎을 주워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어깨너머로 휙 던져버렸어,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 나를 보았어. 그 순간. 무심결에 뒤를 보던 녀석의 눈빛이 나와 마주쳤어, 헉, 닮았더라. 아주 많이. 얼굴 말고 녀석의 하는 몸짓이, 그리고 하얗게 낮달이 내리뜬 가을날의 노란 풍경이 그날과 흡사했어. 그러니까 그 때문이었을 거야. 계절이 다 저물도록 그를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것은.

 

그날, 난 강의실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에 앉아 있었어. 인간 심리학 강의였던 것 같아. 정년퇴임을 한 명예교수님의 강의였지. 조막만 한 얼굴에 아주 왜소한 체구이긴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이며 부드러운 은발이 학생들을 압도하고도 남는 그런 교수님의 514호 강의실을 난 314호로 착각했어. 그때 난 새내기 신입생이었으니 그럴 만은 했지. 너도 그때 가끔은 그랬잖아. 그래서 교수님이 무심코 들어오시다 앞에 앉은 널 보고 자신이 강의실을 잘못 찾은 줄 알고 황급히 나가시더라는 얘기도 했잖아. 네가 폭탄 맞은 듯 파마머리를 부스스하게 올려붙인 그 날에 말이야. 우린 그때 빵을 먹다 네 말에 그만 빵가루를 공중에 투하하고 말았지.

 어쨌든 그날 난 3층의 강의실에서 그를 처음 봤어. 내가 314 강의실을 들어섰을 때 마침 맞은편 시계탑 위에 걸린 햇살이 창 안으로 가득 들어차고 있었어. 그는 해바라기를 하는 것처럼 해를 마주한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314 강의실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 흘깃 본 남자의 뒷모습이 케빈 코스트너를 연상케 했어. 보디가드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말이야.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날렵한 콧날이며 무표정한 옆얼굴, 탄탄한 어깨의 근육이 스크린 가득 채우던 케빈과 똑 닮았어.

창밖에서는 라일락 꽃잎이 바람에 폴폴 지고 있었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어. 남자의 뒤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난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현기증이 났어. 젠장, 그런데 그는 시큰둥하니 내 표정을 무시했어, 내 시선을 분명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 돌아보지 않았어. ‘재수 없어,’ 난 그가 들리지 않게 웅얼거렸지. 좀 생긴 놈들은 지들이 더 잘 알잖아. 물론 우리 여자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런 때는 관심을 거두는 게 상책이라는 건 너도 알지. 그런데 그때까지도 314 강의실엔 학생들이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어. 좀 있으면 수업이 시작될 판에. 이상하다 싶어 강의시간표가 들어 있는 클리어 파일을 열었지. 아뿔싸. 그제야 난 내가 엉뚱한 강의실에 와 있다는 걸 알았어.

 “이런, 바보같이 여기가 아니잖아!” 난 발딱 일어서며 내 덤벙거림에 화를 냈지. 순간, 그가 나를 돌아봤어. 헉, 내 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어. 잘생겨서? 천만에. 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차고 매서웠어. 그때 마침 내 휴대전화가 울렸어. 너였어. 어디에 있느냐고, 지금 교수님이 출석체크 하는데 어디에 자빠져 있느냐고, 빨리 총알처럼 튀어 들어오라고 넌 성급하게 속삭였어. “너 초딩이니? 강의실도 못 찾게.” 그 남자였어, 마치 휴대폰 너머의 너의 소곤대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가 말했어. 기막힌 중저음의 테너 톤으로, 그러고 보니 그는 처음부터 반말이었네.

“뭐라고요!”

나는 발끈했어. 그러다 소리가 목 안으로 기어들고 말았지.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숨이 막혀 얼굴을 들 수가 없더라고. 달아오른 얼굴을 누른 채 서둘러 314 강의실을 빠져나오고 말았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

신현지  shj63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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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지 | shj6369@hanmail.net
담당업무 : 편집부장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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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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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jum 2016-12-27 14:26:48

    지난번 그 겨울의 초상에서는 80년 광주항쟁의 모습이 떠 올랐었습니다.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받는거보니...2000년대의 캠퍼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차박차박이란 단어가 정겹습니다.
    제 친구는 자박자박이란 단어를 대화중에 많이 써서,차이점을 찾아보니

    -.차박차박- 좀 힘 있게 발자국 소리를 내며 빠르게 걷는 모양
    -.자박자박- 건더기나 절이는 물건 따위가 겨우 잠길 정도로 물이 차 있는 모양

    좋은 국어 단어를 작가님때문에 알게되었습니다.

    이 글에 관련되시는 신작가님과 독자님들의 좋은 2016년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감사!   삭제

    • Choi 2016-12-27 12:58:37

      서정적인 시같아요~
      가을 정취가...   삭제

      • Jiyr76 2016-12-26 21:03:43

        소설이 너무 시적으로 아름답네요~   삭제

        • 초승달 2016-12-26 10:18:44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낮달 아래에 황금색 은행잎은 너무나 황홀하고 신비스러워요.작가님 화~팅해요..   삭제

          • 너무 좋아요 2016-12-26 09:17:01

            한낮에 설핏 내리뜬 낮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바람에 우수수 지고 있는 은행잎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고. 해를 비켜선 야윈 낮달 아래로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거든. 온통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을 학생들이 차박차박 밟아 걸으며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어........

            너무 표현들이 아름다워요~~~~

            너무 좋네요~~~~^^   삭제

            • 기대 2016-12-25 17:11:18

              저번 연작소설 좋았습니다.
              이번에도 기대할게요~
              저번이랑 오버럽될까 좀 걱정이지만ㅎㅎ   삭제

              • 이근수 2016-12-23 22:21:24

                잼있게 잘 읽었습니다.다음호 기들리께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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