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의 만남

여의도엔 언제나 바람이 불어. 한강이 바로 곁에 있어서인 모양이야. 며칠 전 계절을 재촉하는 비까지 내려 바람 끝이 한결 더 차가워졌어. 그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배웅하면서 긴 소매 스웨터 위로 털이 폭신한 머플러를 꺼내 두르고 집을 나섰어. 그러니 꼭 대학 때 엠티를 떠나는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그러면서 왠지 기분이 로맨틱해지는 걸 느꼈어. 솔직히 난 그때까지도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또 간밤에 남편이 들어오지 않았냐고? 그래,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언제부턴가 난 남편의 부재에 대해서 별 신경은 안 쓰니까. 그냥 계절을 타는 것인지 밤새 기분이 울적해 있었어. 어쩌면 나이 탓인 지도 모르겠고. 여자가 나이 들면 괜히 센티 해지고 눈물이 많아진다잖아, 그런데 머플러 하나에 금세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으니. 문득 어딘가로 바람을 쐬고 싶었다는 뜻이야.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잠시 집을 비워도 무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교문 안으로 들여보내자마자 나갈 채비를 했어. 가을을 닮은 옅은 립스틱에 프렌치 코트를 걸치고 모양을 냈어. 헌데, 막상 집을 나서려니 갈만한 곳이 생각이 안 났어. 그래서 그냥 우두커니 창밖을 내려다보았어. 30층 창문 아래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이 보이더라고. 부드럽게 출렁이는 강 가장자리로 솜털처럼 하얗게 잎이 샌 갈대가 하늘거렸고. 가물거리는 하늘 끝 멀리로는 하얀 구름이 발효기에서 막 빠져나온 연유처럼 부드러워 보였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노래가 읊조려졌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러고 보니 난 한강을 내려다볼 때면 종종 소월의 시를 읊조리곤 했던 것 같아. 강변을 내려다볼 때마다 습관처럼 말이야. 문득 그것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일어나는 습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정감 있는 가사에 입안에 딱딱 들러붙는 음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 내가 강변을 내려다볼 때마다 소월시를 읊조리게 되는 것은 내 무의식 어딘가에 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야. 그의 고향이 저 아랫녘 섬진강 근처 어디쯤이었거든.

*

그날 314 강의실에서 처음 그를 본 후로 난 구름에 올라앉은 것처럼 가슴이 붕붕 차올랐어. 갓 사춘기를 맞는 소녀의 기분을 표현한다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거야. 그 때문에 그날 오후 무용실에서 발을 접질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어, 밤에는 잠까지 설쳤고. 처음이었거든. 이성에 그토록 끌린 것은.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자마자 314 강의실을 찾았어. 푸훗, 없더라고, 그 다음 날은 오후의 햇살이 시계탑에 올라앉는 시간에 맞춰 3층 강의실에 올라갔어. 역시나 그 남자는 없었어. 그 다음 날도. 그러니까 한 주 내내 난 3층을 기웃거렸던 것 같아. 도서관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살폈고, 학생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딱 한 번 본 남자의 얼굴이 어찌 그토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인지. 사람이 한눈에 반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그때야 깨달았던 것 같아. 그렇게 내 신학기는 그를 찾아 캠퍼스를 누비는 것으로 끝나나 싶었어. 그러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거였어.

그날은 6월 마지막 주였던 것 같아. 시험을 앞둔 주였기도 했고. 후훗, 우습게도 학교 앞 복사실이었어. 시험기간 중 정리해야 할 복사물이 꽤 많았거든. 밀린 리포트도 있었고. 다른 얘들도 나와 같은 형편이었는지 복사대 앞에는 꽤 긴 줄이 늘어져 있었어. 그때 내 앞 세 번째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어. 케빈을 닮은 뒤태라 한눈에 그라는 건 재깍 알아봤지. 물론 그는 날 알아보지 못했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기분이 상했어. 그래서 뛰는 숨을 애써 누르고 나도 그를 모른 척했지. 그렇지만 그가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는 것에는 태연할 수가 없었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르고 말았어. 성큼성큼 보폭을 키운 그가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서는 그때 무작정 뛰었어. 그러다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어. 하필 때맞춰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한 거야.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어. 하얀 조명등 아래 웬 남자의 등이 보였어, 바로 그였어.

“어떻게?”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아아, 가만있어, 그리고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넌 어째 매사 그리 덤벙거리니? 강의실도 못 찾고 헤매더니 오늘은 달려오는 차하고 헤딩까지 하고. 어쨌든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한 이틀 경과를 지켜봐야 안심이라고 하니까. 니 집이 어디야?”

“네?”

“연락은 해야 할 것 아냐, 니 휴대폰 줘봐.”

놀랍게도 그가 날 둘러업고 근처의 병원으로 옮겨다 놓은 거였어. 바로 그가 날 살린 거지. 내가 그렇게 우겼어. 그쪽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러니 앞으로 내가 그 은혜를 갚을 때까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게 하라고.

그래서 그날부로 그와 가까워졌냐고? 천만에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어. 무음 설정이 되어있지 않은 그의 폰 소리가 무지막지하게 응급실을 울렸거든. 헉, 홈 화면에 활짝 웃는 여자의 얼굴이 타자석에서 날아온 야구공처럼 정확히 내 눈을 찔렀어. 그녀가 그의 여친이라는 걸 재깍 직감했다는 거지. 하필 여자 있는 남자였다니. 확 깨는 기분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난 남의 것에 탐을 내는 그런 재수 없는 짓에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으니. 

아쉽지만 그와의 인연은 없는 것이라 생각했어. 헌데, 세상은 참으로 묘하지. 그렇게 찾으려 할 때는 보이지 않던 그가 마음을 접으니 학교에 가는 족족 눈에 띄는 거였어, 그날도 그랬어. 점심을 먹고 애들이랑 예술관 분수대 앞 자판기 앞에 섰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어. 넌 그때 커피를 삼키다 말고 누구냐고 눈으로 물었지.

 “어이 이봐, 헐랭이! 오늘은 여기에서 보네. 그럼 오늘은 이 생명의 은인에게 자판기 커피라도 한잔 대령해 보실 건가?

아 참,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가. 그는 우리 학교 학부생이 아니었다는 것. 그는 박사과정 중이었어. 314 강의실에 있던 그 날은 국문과 교수님의 수업 결강으로 그가 그 시간을 대신해 왔던 것이고. 그러니 무용과인 내가 그를 알 리가 없었지. 어쨌든 그날 그는 연한 브라운 톤의 셔츠에 청바지로 어느 때보다 꽤 괜찮아 보였어.

“고작 그 일에 절 너무 우려먹는 건 아니에요?”

“뭐, 고작 그일? 우려먹어? 그러고도 무슨 생명의 은인입네 어쩝네, 은혜를 갚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피, 누가 업어 날라라 했나요. 그냥 뒀어도 그날 날 업어 나를 인간들은 쌔고 쌨는데, 하필 눈치 없이 냉큼 업어 나르는 바람에, 그렇게만 안 했으면 지금쯤 꽤 괜찮은 남친과 분위기 있는 커피숍에서 크 큭.”

“야, 물에 빠진 놈 건져 올렸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헐랭이 니 놈이 딱 그 짝이다. 그리고 뭐 괜찮은 남자? 분위기 있는 커피숍? 나만큼 잘생긴 남자가 어디 또 있다고. 그런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잔말 말고 빨리 커피나 뽑아와 인마.”

그런 그에게서 애써 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다시 튀어 올랐어. 솔직히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었어. 애써 마음을 접으려 했던 나 자신이 한 순간에 무너졌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굳이 감추고 참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더구나 그가 결혼 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난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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