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마향

점점 그와 만남의 횟수는 잦아졌지. 물론 의도적인 내 접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와 잘 맞았어, 가갸 거겨를 운운하고 한국통사에 코를 박고 있는 국문과 샌님들과는 달랐다고. 그는 국문과에 어울리지 않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이면서도 엘가의 사랑의 인사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어,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복병은 너무 돈이 없다는 거였어. 거기에 그놈의 열등감까지. 그래서 시시콜콜 내 씀씀이며 행동에 제동을 걸었어. 그 흔한 커피 한잔에도 그는 심하다 싶게 잔소리였어. 너의 그 한 잔의 커피 값도 안 되는 돈을 벌려고 종일 부서져라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너는 알기나 하는 거냐며. 그런데도 난 그가 싫지 않았어. 그러니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 하긴 돈을 쓸 줄만 알았지 한 번도 내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으니. 아참, 있었구나! 그래, 너도 기억 날거야. 영등포였던가. 수능을 끝내고 실기 시험까지 마친 겨울방학 때였지. 역사(驛舍) 건물 안에 있는 3층 커피숍에서 우리 알바 했잖아.

고작 일주일 하고 관두긴 했지만.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호기심에 나선 것이니 오래갈 리는 없었지. 쥐방울만 한 여중생들과 대판 싸움을 벌인 것도 그때였고. 진한 스모키화장에 치골이 다 들여다보이는 짧은 스커트로 다리까지 비딱하니 꼬고 앉아 탁자가 잘 닦였느니 안 닦였느니 시비를 거는 그것들의 꼴을 우리가 일주일씩이나 참아줄 수 있었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 결국, 우린 그것들을 늘씬하게 패주고는 그 후환이 두려워 그 일을 관두었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그 시절 우린 엉뚱했어. 어쨌거나 그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라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마다할 처지가 못 되었어.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일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그리고 그날 병원에서 봤던 휴대폰의 여자는 그의 여동생이라는 걸 뒤 뒤늦게 알았어. 그는 동생의 학비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궁색한 집안의 장남이었다고.

*

“애들아! 웬만하면 남친에겐 무대화장은 가까이서 보여주지 않는 게 좋아.” 네가 그랬어. 태민이가 처음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 남친이 태민이 춤을 보러오겠다고 전화가 왔을 때 네가 그 옆에서 그 말을 했어. 그때 난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왜냐고 물었지. 그러자 넌 그랬어, "야 무대화장은 멀리서 봤을 때야 예쁘지만 가까이서 보면 솔직히 피에로의 분장처럼 과장되어 우스꽝스럽잖아, 환상이 깨진다고. 그럼 다음 진도는 빤해. 결국은 그것들이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고. 그러니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라면 도깨비 화장은 가급적 뒤로 미루는 게 좋아. 실은 나도 그 때문에 그놈이 줄행랑을 친 것 같으니까 흑흑.”

너의 그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널 한참이나 봤어, 그러자 넌 나를 돌아보며 "어쭈, 봐 줄 남자도 없는 게 예민하기는." 했어. 맞아, 난 그를 좋아한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는 날 자신의 여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했으니까. 그래도 난 막무가내로 공연 초대장을 그의 손에 쥐어줬어. 그가 엉겁결에 받아들자 난 그것으로 그가 내 공연에 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러니 난 네 말에 어찌 귀에 솔깃하지 않았겠니.

어쨌든 그날, 공연은 평소 같지 않게 엄청 떨렸어. 그가 무대 아래 객석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손발이 자유롭게 움직여지지 않았어. 그날 난 리허설부터도 긴장을 했던 것 같았어. 그 바람에 2막의 마지막 파드되에서는 교수님이 무대 위까지 올라와 내 귀를 잡아챘잖아. 그것에 니들은 터지는 웃음을 참아내느라 애꿎은 토슈즈 끈에 코를 박았고. 젠장, 난 그 일 아니어도 여러 번이나 그 교수님께 꼬집히기는 했지만, 그날만큼은 정말 교수님이 야속했어. 그때 넌 내게 다가와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 콩쿠르에도 그처럼 떨려본 적이 없었으니.

그런데 그날 그는 그곳에 오지 않았어, 그날 그는 오랜 투병으로 누워계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골에 내려갔던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며 이를 물었고. 그리고 그날 밤 니들을 선동해 밤새 젊음을 즐겼던 것이고, 물론 그러면서도 난 그에게서 전화 오기만을 기다렸어. 그럼, 앞으론 내게 전화 같은 것 절대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쏘아붙일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그의 전화는 없었어. 하루 이틀 사흘……. 오래된 유행가의 가사처럼 오지 않는 전화에 난 마음만 까맣게 타들어 갔어. 아니, 그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어, 결국, 내가 그의 번호를 찾아 누르고 말았지.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어. 가을비였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비바람에 폴폴 지고 있는 정동극장 앞에서 난 30분 이상을 기다렸던 것 같아, 빗속에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빗속에 30분은 평소의 서너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거였어. 지나는 사람들의 흘끔흘끔 보는 시선도 거북하긴 어느 때보다 심했고. 그래도 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어. 왜였냐고? 그것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은 짓이었는데 왜 그랬느냐고. 그래 맞아. 그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어. 하지만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어쨌거나 난타공연장 쪽에서 내려오는 일본 여행객들의 맨 꽁무니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했어. 그때 그는 노란 은행잎을 주워들고 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것을 휙 날리고는 피식 웃었어. 그 웃음에 그만 눈물이 나왔어. 찔끔찔끔 그러다 펑펑.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던 것인지 그가 큰 소리로 마구 웃기 시작했어. 창피했어.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어. 비바람에 나뒹구는 낙엽까지도.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숨이 막히게 좋았어. 헌데, 웃음을 멈춘 그가 싸늘한 시선으로 날 보더라고.

그런 그가 다가와 나직하게 소곤거렸지. 부모 잘 둔 덕에 응석밖에 부릴 줄 모르는 네가 세상에 대해서 무얼 알겠냐고. 학생 주제에 몇 백씩이나 하는 가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걸고 다니는 너 같은 애들을 보면 경기가 난다고. 아니, 네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값이 나와 내 동생에게는 한 끼 밥값이 되는 걸 넌 어찌 생각하느냐고. 그러니 넌 절대 내 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젠장, 그것이 남녀 간의 만남에 뭐가 중요하다고. 난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날 난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옷깃을 잡아채 따귀를 올린 기억밖에는. 아니지, 그 순간 맡아지던 아로마향.

그의 품에서 맡아지던 스킨 냄새였어. 첫 입맞춤이었다고. 올려치는 내 팔을 틀어쥐고 느닷없이 내 몸을 와락 잡아채는 그의 완력에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떨어뜨렸어, 아마 우리 곁을 지나는 사람들도 놀랐을 거야. 물론 난 그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어. 지그시 감겨드는 그의 부드러운 감촉과 터질 듯 펌프질하는 심장박동 소리. 그대로 시간이 정지되는 줄 알았어. 아, 난 지금도 그의 아로마향과 어깨를 쓸어 감던 그의 완력이 생생해. 여전히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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