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4학년 그해 여름, 우린 기대 이상의 연인으로 발전했지. 그렇다고 그와 나의 농도 짙은 스킨십을 상상한다든가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해서는 곤란해, 그는 그것에는 늘 거리를 두고 있었거든, 난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받아 놓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풀지 않은 그것처럼 늘 가슴이 떨렸어.

그런 그가 그해 여름, 대학 강단에 서는 걸 포기하겠다고 말했어, 시간강사 자리 하나에도 목을 매고 눈치를 살피는 그런 자신이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면서. 선배가 내놓은 학원을 인수해보겠다고 했어. 난 그런 그가 안타까웠어, 그의 지도교수가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박사 논문 통과에 자신의 사적인 일에까지 부려 먹고서도 여전히 그를 기운 빠지게 했으니. 다른 누구처럼 그가 따로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시골집에 다녀와야 하는데 동행해 줄 수 있겠느냐고 했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 마침 방학이었고 또 그의 고향 집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 날씨는 엄청난 찜통 더위였어,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지독한 날씨 속에 고속도로마다 휴가지로 떠나는 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어. 그런데도 그의 시골집 어머니는 마을 여인들과 고추밭에 엎드려 고추를 따고 계셨어, 마을 여인들 속에 섞여 있는 그의 어머니는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와 똑 닮은 모습이었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금은 냉소적으로 보이는 표정까지도. 그런 그의 어머니가 낯설지 않았어, 하지만 어머니는 나와 다른 눈치였어, 뭐랄까. 허리를 펴 슬며시 훑어보는 눈빛에 뭔가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어. 그건 내가 준비해간 한 아름의 칼라를 보고는 더욱 그랬어.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도 보는 듯 날 당신의 아들 짝으로는 어림없다는 표정이셨지.

그러니까 그가 꽃을 사겠다는 날 한사코 만류했던 이유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어. 그가 자신의 어머니는 꽃에는 관심이 없는 여인이라고 했거든. 사시사철 문만 열면 사방천지로 보이는 꽃 나부랭이가 어디 사람의 배를 채워주기는 하는 거냐고 했다던 그의 어머니 취향을 내가 무시한 게 잘못이었다고, 그래도 난 아무리 나이 든 여자라 해도, 그리고 문만 열면 사방천지로 꽃이라 해도 우아한 칼라를 싫어할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의 어머니와의 첫 만남을 분위기 있는 칼라로써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고. 결국, 그의 어머닌 뜨악한 표정을 짓다 툭 한 말씀 하셨어.

“아따, 그냥 오지, 이 삼복더위에 뭔 꽃은, 솔찬히 비쌌을 것인디, 그리고 이왕 돈을 쓸라면 찬거리 되는 괴기나 사오든가. 여 봐, 여 동네는 사방팔방 꽃이여 저짝도 이짝도.”

그가 무안했던지 황급히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꽃을 낚아채 수돗가의 빈 항아리에 꽂았어. 그 때문에 그는 날 소개할 기회를 잃고 말았지. 아니, 바로 그때였어.

“야는 이 시골구석이 뭐가 좋다고 올 때마다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지 모르겄어, 하긴 물 좋고 산 좋고 더위 피하기로 여기만큼 좋은 디가 어디 또 있겄냐만은. 이봐요! 이왕에 왔으니까 편히 쉬었다 가더라고. 요새는 남녀가 서로 친구 되는 게 숭도 아닌 게로, 또 그걸 이해 못 할 나도 아니고…….”

당혹스럽게도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앞서 먼저 선수를 치신 것이야. 행여 아들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그렇게 먼저 입막음을 하신 거라고. 그러니 그도 자신의 여자를 소개할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고. 나 역시도 그런 분위기에선 예비 며느리로 인사드리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의 어머닌 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건지 모르겠어. 허벅지가 드러나는 미니를 입은 것도, 엉덩이가 툭 불거져 나온 스키니를 입은 것도 아닌데. 아무튼, 마음은 영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어.

그의 시골집이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거든. 마을 뒤로 부채를 펼쳐 놓은 듯 겹쳐 펼쳐진 산들과 그 아래로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는 농가들. 마을 앞을 휘감고 도는 강물은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한 움큼 움켜 삼키고 싶을 정도였다고.

수심이 들여다보이는 강바닥 아래로 작은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도 기가 막혔고. 어둠이 내리자 강마을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날 매료시켰어.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처럼 둥실 떠오른 산등성이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별들이 마치 에메랄드 같았어. 까만 비로드 위에 진열된 보석 말이야. 확 쓸어내리고 싶을 만큼 강한 충동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어.

마침 그의 어머닌 저녁상을 마치자마자 일찍 방으로 들어가시는 바람에 그와 나만이 마루에 나와 앉아있었거든. 헌데 그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었어. 왜 아니겠어. 박사까지 딴 놈이 무슨 학원이냐며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셨으니, 거기다 날 자신의 여자라고 소개할 기회도 잃었으니 그가 기분 좋을 리가 없었지. 그런 그가 깜짝 소리치는 날 넌지시 보더니 힘없이 웃더라고. 문득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가서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활짝 웃어 보였지. 힘을 내라는 뜻이었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라고. 그런 그가 대문 밖으로 눈짓을 보냈어. 나 역시 그대로 잠들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밤이라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도 싶었고.

대문을 나서니 온통 어둠이었어,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긴 했지만, 그 빛이 멀리까지는 미치지 못해 산동네는 깊은 동굴처럼 깊고 아득했어. 마치 빛이 열리지 않은 태초의 어둠처럼. 어둠 속에선 짝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만이 요란했고. 난 그런 어둠이 신기했어. 한편으로는 뭔가가 불쑥 내 뒤통수를 잡아챌 것 같은 무섬증도 일었고. 그렇지만 그는 그런 어둠에 익숙한 듯 곧장 마을 앞을 지나 강가로 날 안내했어. 마을의 수도가 놓이기 전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였다는 강가로.

 그곳의 너럭바위에 앉자 물소리가 참으로 청아했어. 바람도 시원했고, 그때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서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그으며 어둠을 갈랐어, 아, 무대 위의 장엄한 피날레를 보는 듯 전율이 흘렀어. 그렇다고 우리가 그 때문에 이성을 잃었던 건 아니었어. 우린 나란히 발을 담그고 첨벙거리다 무심히 발에 걸린 다슬기를 건져 올리고 그것에 휴대폰의 빛을 밝혀 몇 마리의 다슬기를 더 잡아 올리고. 그러다 문득 서로의 시선이 마주쳐진 것이지.

그 순간, 세상에 우리만이 덩그렇게 남겨진 그런 것처럼 서로가 절실해지는 기분이었어.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거야. 그와 시선이 교차되고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느껴지는 그 찰나 그의 뜨거운 숨에 난 그만 작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만 거야. 그래서 깊은 암반층을 뚫고 지표 위로 솟는 그의 뜨거운 폭발력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 거라고.

그 밤이 우리의 첫 밤이었다고. 그렇게 우린 그 밤에 무인도에 닻을 내린 한 쌍의 유인원같이 자유로워졌어. 막 직립보행을 시작하는 유인원처럼 우린 서로에게 무장 해제가 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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