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경배 국장]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이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사실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논란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 정부를 향해 ‘전쟁범죄 인정과 공식 사죄’를 촉구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에 일본 정부가 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인정했으며 이듬해에는 무라야마 총리가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죄하는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법적 책임이 해소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우리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반박하면서 양국간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그러던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렸고 24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가 타결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합의를 동의할 수 없다고 계속 반발해왔다. 그 이유는 피해자들이 간절하게 바라던 진상 규명과 법적 책임이 빠졌고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협상 과정과 내용을 알리지 않는 등 피해자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 합의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이전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의 문제 제기 불가,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대한 등재신청을 하지 않는 다는 조건, 실제로 이 조건에 발마추어 박근혜정부는 위안부 기록물 관련 유네스코 등재 추진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기에 이른다.

또 배상금도 아닌 위로금 형태로 지원된 약 10억 엔 등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10억엔 받자고 그동안 줄기차게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주요 합의 사항중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가해자의 사실 인정을 뒤덮는 것이다.  더 이상 일본정부에 대해 위안부문제를 왈가불가 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국민과 피해당사자들의 반발은 계속 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부산 일본총영사관앞에 소녀상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한일합의사항 불이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미적거릴 수 없는 이유는 국민여론 때문이다.

결국 국민여론과 무관하게 졸속으로 협정을 추진하다 보니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협정을 준수하기도, 여론을 무시하기도 애매한 어정쩡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소녀상 설치에 대해 일본의 대응은 강경했다. 나가미네 대사를 소환시켰고 통화스와프 협의 중단 등의 조치를 발표했으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이 “한국과 일본 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10억 엔의 돈을 냈다”며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 같은 압박은 한국 국민들의 반일감정만 높였으며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한일간 위안부 합의에서 한국 정부는 소녀상 철거를 약속한 적이 없거니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문제로 한국정부가 국정공백상태다 보니 구체적인 움직임 없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펀치를 날렸으나 상대방이 반응이 없으니 답답하기는 일본이 더한 셈이다. 일본 측도 한국 상황을 알고 있으니 뾰족한 출구전략도 없다. 그렇다고 한국정부를 계속 압박하기에는 대중, 대북한 문제를 고려할 때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국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기에는 한국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않고 졸속으로 한일 위안부 협정을 밀어붙인 박근혜 정부. 소녀상 설치에 대해 강펀치를 날렸으나 오히려 한국 국민들의 반일감정만 높인 일본정부.

서로 자충수만 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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