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뒤에 숨은 낮달

사람들은 흔히 사랑은 변한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야 사랑은 변하지 않아, 다만 상황이 사람을 그리 착각하게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난 그를 떠나게 된 거였어. 왜였냐고? 왜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냐고? 천만에 난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고 그랬잖아.

그렇지만 난 깨달았어.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걸. 그가 내게 반복해서 했던 말들의 뜻을 늦게야 이해를 하게 된 것이었다고. ‘너의 그 한 잔의 커피 값도 안 되는 돈을 벌려고 종일 부서져라 일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너는 알기나 하는 거냐.’ 물었던 그 말의 뜻을 알게 된 것이라고. 아니, 종일 부서져라 일하는 아이들 중 그도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했어. 그때까지도 그는 시간 강사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라고. 그러니 다른 친구들처럼 명품 가방은 그만두고라도 찻값 하나에도 그의 기분을 생각해야 하는 그런 것들에 점점 지치기 시작했어. 그깟 14K 반지 하나에도 깜짝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내숭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그러니 처음 그의 어머니가 날 정확하게 잘 보신 게지. 자신의 아들에게 상처 줄 여자라는 것을 미리 알아보신 거라고.

그리고 실은 그때 한 남자가 내게 들어와 있었어. 이모가 소개한 남자.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내 남편이었지. 남편의 집안은 그와 절대 비교할 수 없게 훌륭했어. 그 당시 남편은 군의관이었지만 조부 때부터 내려온 의사 집안이라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였어.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걸 그는 금방 알아챘어. 왜 아니겠어. 평소 그의 심기를 살피느라 조심했던 옷이며 가방, 그리고 내 스타일의 모든 것들이 눈에 띄게 달라졌는데.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지만 나도 별도리는 없었어. 사랑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 수 없게 만든 게 나는 아니니까. 결혼과 연애가 별개인 세상에서 나라고 다르지 않은 것을.

점점 그와는 만남이 뜸해졌지. 그러다 11월 중순쯤인가. 날은 맑았지만, 찬바람이 몹시 불어 몸이 잔뜩 움츠러드는 그런 날이었어. 분수대 앞 커다란 은행나무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잎들이 팽이처럼 팽그르 돌다 힘없이 굴러 떨어지는 그곳에서 그가 그 노란 나뭇잎들을 눌러 밟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두어 달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어, 달려가 힘껏 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가웠지만 난 멀찍이 서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어. 그 역시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어. 고개를 들어 나를 넌지시 바라봤어, 그런 그의 눈빛이 벼랑 끝에 선 짐승처럼 고독해 보였어.

“그동안 잘 지냈니?”

목소린 따뜻했지만 뭔가 단호했어, 난 직감했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역시나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했어. 고향의 모교에 기간제교사로 가게 돼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는 재깍 등을 돌려 내게서 멀어졌어.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눈물이 쏟아지는 것에 애써 하늘을 올려다봤어. 젠장, 낮달이 떠 있더라고. 여리고 순한 낮달이. 그가 낮달이 뜬 아래를 휘적휘적 걸어가다 허리를 굽혀 나뭇잎을 하나 주워들었어. 그러다 등 뒤로 휙 날렸어. 그때 예감했어.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지지 않을 낮달이 하나 간직되었다는 것을,

 

*

어느새 바람이 바뀌었어, 강 건너편 하늘 위로 구름이 까맣게 몰려오고 있어. 아마도 눈이 내릴 모양이야. 그럼 올해의 첫눈이 되겠지. 그래도 낮달은 하늘 어딘가에 떠 있을 테고. 눈이 내리는 섬진강 위에도 말이야. 아, 그곳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어. 난 한 번도 그곳 강가에 눈 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 무척 아름답겠지. 그가 누이 같은 아내와 눈 내리는 강둑을 거닐지도 모르겠어. 그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무 잘 살면 곤란해. 그도 가끔은 나처럼 가슴에서 피리 소리가 났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렇게 멍하니 하늘의 구름을 세다 구름 뒤편에 숨은 낮달을 발견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지금 와 그와 어쩌겠다는 말은 아니야. 그 시절이 다시 온다 해도 그때의 결정에 번복할 자신은 여전히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만약에 말이야. 신이 그 어떤 실수로 내게 단 하루만의 시간을 남겨둔다면, 그렇다면 난 그 남은 하루를 그와 보내고 싶어. 아주 많이 사랑했고 아주 많이 미안했던 남자. 아무것도 개척되지 않은 무명의 땅에서 그를 만났더라면 우린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유인원이었을 텐데. 후훗, 새삼스럽게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다니.

그래도 s, 네게 마음을 털어놓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아. 아무리 속물이라도 부끄러움을 모르진 않으니. 어머나! 그런데 벌써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된 것 같아. 빨리 움직여야겠어. 오늘은 큰아이의 어학학원에서 참관수업이 있거든. 작은아인 바이올린 레슨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앞에서 바로 녀석들을 픽업하는 게 빠르겠지. 그러니까 우리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좋겠어. 물론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말이야. 그땐 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어, 사랑만으로 그 모든 걸 용기 냈던 너의 사랑이야기를……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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