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경배 국장] 죽이거나 살릴 사람의 이름을 미리 적어놓은 문서를 살생부(殺生簿)라고 한다. 살생부는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면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주로 정적을 구분하고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졌다.

고려조때 왕권 강화책을 추진한 광종의 경우에도 이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을 제거하는데 살생부가 활용됐을 것으로 추측되며 무신정변이나 정권교체기에 살생부를 통해 미리 살릴 자와 죽을자를 구별해놓고 숙적들을 제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헌상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살생부는 조선 단종때 한명회가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양대군은 그동안 자신의 편으로 포섭해 놓은 책사 한명회와 권람, 신숙주 등 계유정난의 주역들과 더불어 왕위찬탈을 위해 1453년(단종1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계유정난의 명분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을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한명회의 살생부로 인해 우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의정부찬성 이양, 조번, 하석, 이명민, 조수량, 정분, 허후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조정 신료와 지방 관리들이 죽거나 유배됐다.

반면, 권람, 홍달손, 한명회 등 정변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과 정인지, 한확, 최항 등 수양대군의 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42명은 정난공신에 책봉되고 요직에 앉게 된다. 결국 살생부란 정적제거를 위한 도구인 것이다.

서양에서도 살생부는 고래로부터 있어왔다. 고대 로마에서도 살생부(Proscription lists)를 정적 숙청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기원전 82년 개혁파와의 싸움에서 이긴 원로원파의 독재관 술라는 ‘국가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 1,600여 명의 명단을 포룸 로마눔 광장에 내걸었다.

이름이 오른 자는 시민권이 박탈되고 누구든 이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상금까지 받았다. 또 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로 이뤄진 제2차 삼두정치에서도 살생부가 나왔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황제가 되어 로마 제정 시대를 열었다.

살생부와 비슷한 뜻의 단어로는 블랙리스트(black list)를 들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을 뜻하지만 블랙리스트는 현실에서 살생부에 더 가깝다. 블랙리스트의 유래 역시 숙청과 관련 있는데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아버지인 찰스 1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명단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 발생한 노동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이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1978년 동일방직 사건 때 작성되어 각 사업장에 배포된 블랙리스트로 인해 1983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 태평특수섬유에서 해고되고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민주 노조 출신 노동자의 해고 사태가 속출하면서 수면위로 떠올랐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

그러다 1984년 성남의 고려피혁과 인천의 세창물산을 통해 노동계 블랙리스트의 구체적인 증거가 나왔고 특히 1991년 9월 8천여 명의 블랙리스트 명단이 부산소재 금호상사 전산실에서 발견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노동 인권 탄압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세간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이미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부 장관이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그 국가와 사회의 건전성과 민주주의의 발전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이다. 권력을 기반으로 자기편에게는 꽃길을, 아닌 사람은 적으로 규정하고 가시밭길을 강요하는 것은 문화적 후진국, 봉건시대 전제주의 국가에서나 나타나야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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