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 여류 서양화가가 외딴 시골에서 소박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북 정읍 입암면 접지리의 '단미'란 개인 갤러리. 국도 1호선 입암면 소재지에서 자동차로 10여분 떨어진 이곳 갤러리를 지난 1일 찾았다.

외딴 마을에 웬 서양화가의 갤러리가 있을까란 생각에 이를 소개하기 위해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니 한적한 마을에 서구식 건물이 바로 눈에 띤다.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활동에 대한 것 보다는 뜻밖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한국미술협회 정읍미협 지부장을 맡고 있는 권순덕 화가(61)가 이곳 고향에 터를 잡고 개인 갤러리를 마련한지는 5년전.

화가의 평생소원이라는 개인 갤러리와 함께 가족이 거주할 집 한 채를 마련했지만 입주해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평생 펼쳐온 꿈을 접어야할 형편에 놓였다.

집 바로 앞까지 KTX 호남고속철 교각 공사가 한창인 현장의 광경은 이미 집 앞 풍광을 가로막고 있었다. 3000㎡ 갤러리 가운데 30~40%가 떨어져 나가게 생겨 아침저녁으로 "이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에 깊은 한숨만 늘었다.

권순덕 화백이 이곳에 갤러리를 마련할 때만해도 앞마당을 회원들과 시민들이 미술과 지역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독특한 공간으로 꾸미기로 마음먹은 터라 더욱 안타깝다.

또 다양한 전시회를 유치해 작가들이 항상 드나드는 예술 문화 공간을 마련해 관광벨트의 한 코스로 개발한다는 당찬 구상도 가졌지만 이제 물거품이 될 운명에 맞았다.

토지보상 이의신청을 해놓았지만 턱밑까지 밀려들어온 철도 교각 공사 현장은 집 거실 내부가 훤히 보일정도로 가까이 있어 갤러리도 갤러리지만 생활공간마저 침해를 당하게 된다는 생각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곳을 방문하는 협회 회원들과 주변 예술인들도 "철도 밑에 있는 갤러리를 누가 보러 오겠나"며 걱정의 시선을 보낸 후 발걸음마저 차츰 줄고 있다.

공무원 아들이 작명해줘 붙여진 '단미'란 갤러리 이름은 "지혜로운 여인, 아리따운 여인이란 의미로 여기오신 분들 모두가 그런 의미를 간직하란 뜻에서 붙이게 된 것"이란 권 화백의 평소 깊은 뜻은 한갓 사치에 불과하게 됐다.

권 화백 인생에서 미술을 택한 것은 사실 청년시절 어려운 고비때 붓을 들면서 작으나마 힘을 갖게 해줘 결국 인연을 맺게 됐다. 그래서 앞으로 작품활동이 더욱 절실하지만 그도 잠시 30년 화가 인생에서 다시 고비를 맞게 돼 가슴을 쓸어내리고만 있다.

권 화백은 "캔버스 앞에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3~4시간 꼬박 앉아있으면서 그림과 대화를 많이 한다"며 그간의 작품활동을 소회했다.

권 화백은 하지만 "화가의 꿈이 개인 갤러리 갖는 것인데 그 꿈을 펴기도 전에 앗아가 버렸다. 정읍 지역사회나 예술계로서도 큰 손실이 아니냐,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지자체 행정에 기대도 보지만 무대책인 것은 마찬가지다"며 푸념했다.

더욱 걱정인 것은 60여명의 협회 회원들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작품활동 환경에서 작품의지마저 꺾이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시했다.

과거 전북도전 초대작가 40여명 가운데 한명으로 꼽혔던 그녀는 각종 미술대전 대상 수상의 경력은 물론, 지역내에서 가장 많은 공모전을 개최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작가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지난해 초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도 관람객들에게 "토속적인 고향과 애향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서울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반응으로 힘은 됐지만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편치 않다.

스승인 박남재 원로 화가도 "아리따운 한 소녀가 손길로 하나 하나 심어가듯 사랑이 넘쳐보이는 작품들이 정겹게 보인다"는 그녀의 작품에 대한 평에 아직도 가슴속 정열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 서양화가다.

그런 작품 활동에 대한 이글거리는 열정은 아직 남아있지만 이제는 현실로 닥친 커다란 장벽을 어떻게 넘어야 할 것인가 상념에 잠겨 잠못 이룬 밤을 보내고 있다.

전북직물조합 이사장인 남편 신용근씨(63) 사이 출가한 2남1녀의 자녀들도 이번 설에 고향을 찾았다. 가족들의 걱정에 다시 힘을 가져본다.

권 화백은 급기야 "이곳보다 풍광은 없어도 철도에 가리지 않는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야 겠다"고 하고 구체적 계획을 구상해보지만 아직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달말을 끝으로 3년의 임기가 마감되는 정읍미협 지부장직도 미리서부터 고사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런 와중에도 정읍 시민들을 위한 전시회 유치만큼은 희망을 늦추지 않고 있다. 미술은 시민곁에 항상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녀로서는 시청 로비에서 각종 전시회를 열어 시민과 함께 공감해야 하는 것은 의무사항이다.

여느 여류 화가들은 학창시절 시작한 그림을 결혼하면서 담을 쌓지만 권 화백은 이런 어려운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이 순간에도 과거에 이루었던 성취감만 머리 속에 그려넣고 있다.

권 화백은 이날도 언제 뜯겨나갈지 모를 작업실에서 다시 캔버스와 대화를 나눈다. "그림아 너는 왜 이렇게 생겼니, 그럼 이렇게 다시 만들어 줄까"라는 권 화백의 독백만이 쓸쓸한 작업실을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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