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서울대 출신 엘리트 박원순의 세 번의 전환점을 준비한다

(사진=뉴시스)

[뉴스포스트=설석용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다. 당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후보 단일화를 이루면서 인지도가 적었던 박 시장의 정치행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잘나가던 인권변호사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가난을 뛰어넘은 명석한 두뇌로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는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그는 "'탐욕'을 쫓지 마라"는 멘토의 가르침에 시민운동가로서의 삶은 택한다.

성실하고 끈기 있는 성격에 하는 일마다 성공궤도에 올라 서울시장을 두 번이나 한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이제는 대통령의 꿈을 갖고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다소 부진한 성적으로 야권 주자들 중에서도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지만 두 차례 서울시장을 지낸 이력은 충분히 대권을 거머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룰이 결선투표제를 포함한 완전국민경선제 방식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박 시장의 마지막 스퍼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고-서울대 엘리트코스지만...

긴급조치 9호, 인생의 전환점 돼

검사 옷 6개월 만에 벗어던진 사연

멘토 조영래 변호사와의 운명적 만남

◆ 경기고-서울대 엘리트 코스 밟은 박원순

박 시장은 1956년 3월 경남 창녕 가난한 시골마을 농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전기구경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박 시장은 유명한 책벌레였다.

공부를 잘했던 박 시장은 서울 경복고를 희망했지만 실패하고 한 해 뒤 경기고 입학에 성공한다. 1975년 서울대 법대 진학을 하면서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코스'를 밟은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 시절 학생 운동에 참여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박 시장 역시 서울대 진학 3개월 만에 유신체제 반대 학생 운동에 나섰다가 투옥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해당 학교에서 제명되는 사례가 많았는데 박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대에서 제명당한 박 시장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나중에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박 시장은 4개월여 동안의 투옥생활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다. 당시 유신헌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잡혀와 부당하게 옥살이를 하는 모습을 본 박 시장은 법조인의 삶을 준비하게 된다.

제22차 사법시험에 합격한 박 시장은 1982년 대구지검 검사로 첫 발령을 받았지만 6개월여 만에 돌연 검사 옷을 벗어던지고 변호사의 인생을 선택한다. 사람을 잡아들이는 일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매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박 시장은 인생의 멘토였던 故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함께 당시 사회적 이슈를 몰고 왔던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구로동맹파업 사건'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변호사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박 시장과 조 변호사는 뜻을 함께하는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정법회'라는 모임을 결정해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확대 개편한다.

민변의 창립멤버로서 좋은 평판을 얻었던 박 시장은 꼼꼼한 성격 탓에 그를 찾는 의뢰인이 많아 어느 새 제법 큰 단독 주택에 살 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살게 됐다.

 

◆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 조영래 변호사의 작고

1990년 12월 박 시장의 멘토였던 조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다. 조 변호사는 임종을 맞기 직전 박 시장에게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졌다.

변호사로서 성공의 길을 달리던 박 시장이 세속적인 삶을 쫒는 것에 대한 충고를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박 시장은 일을 멈추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살던 집을 팔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하고 탐욕의 열차에서 하차한다.

영국 정경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2년 간 공부하며 사회 속의 시민의 역할, 시민참여 문화, 시민운동의 사례 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박 시장은 이를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접목시킬지를 고민하며 귀국해 참여연대를 설립한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시점이다.

참여연대는 합리적인 사회를 축구하며 인권침해 관행을 바꾸는 데 앞장섰고, 반부패 투명사회운동, 조세개혁운동 등 왕성한 시민운동을 펼쳤다.

특히 박 시장은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맡아 민생법안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을 입법화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또 노령연금을 지금하지 않고 있던 정부를 상대로한 반환소송을 승리로 이끌어 노인들의 수당을 되돌려주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자리가 잡고 나서 박 시장은 2001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해 나눔운동을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의 모델을 창출한다.

아름다운 재단은 2006년에는 중고 생활용품들을 기증받아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가게를 열어 사업을 확장했고, 2009년에는 아름다운 커피를 설립해 사회적 기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초청 조찬 좌담회에 참석한 박원순(왼쪽부터) 서울시장, 김부겸 의원, 이재명 성남시장이 손을 잡고 있다.(사진=뉴시스)

◆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이제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박 시장은 35대에 이어 36대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하며 대권 진출의 발판을 마련해 논 상태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서울시장 출신으로, 서울시장직은 시정 능력을 인정받아 청와대로 가는 길목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박 시장은 다소 주춤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국면 속에 진행되고 있는 대선 레이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양강구도로 일단 시작됐다.

뒤를 따르는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는 치열한 중위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 박 시장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나 반등 기회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박 시장은 이재명 성남시장, 김부겸 의원과 공동경선·공동경선을 주장하며 야권 연대를 촉구하고 나섰지만 당 지도부는 24일 결선투표제를 포함한 경선 룰을 확정 발표했다. 박 시장의 주도적인 연대 작전은 일단 실패다.

결선투표제의 관건은 누가 2위를 차지하느냐다. 1위 후보가 과반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면 1위와 2위가 다시 재대결하는 제도로 2위 득표자의 막판 뒤집기가 가능하다. 현재 중위권들에게는 끝까지 레이스를 펼칠 동력이 된 셈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는 박 시장과 김 의원은 경선 불참까지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절 이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거취를 정하고 문 전 대표가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 대선시계는 더 빠르게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박 시장은 재기의 발판을 다시 한 번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대선의 무게중심이 일단 야권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도 지나치게 한 쪽으로 쏠려 있는 감이 없지 않다. 차기와 차차기 모두를 대비한다 해도 이번 경선에서의 2위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전망이다. 박 시장의 대통령의 꿈을 위한 정략적 행보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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