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산 외딴 집

계곡 아래로 하얀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숲길 옆으로 낮은 슬레이트 지붕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자작나무보다 더 투명하게 반짝였다. 오늘도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거름을 가득 실은 경운기가 털털거리며 슬레이트 지붕의 오두막 옆을 지났다.

경운기가 지나는 동안 슬레이트 지붕 위로 붉은 꽁지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로 날아오르다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졌다.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바람이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 때마다 잔가지의 떨림은 계곡 위의 소년에게까지 올라왔다. 어쩌면 오늘도 오두막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지 몰랐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년이 본 것은 모두가 허상인지도. 소년 안에 든 그 무엇이 퉁겨져 소년을 망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인지도.

겨울 해는 짧았다. 4시 30분이면 산골의 해는 어김없이 종석산 위로 허리를 접었다. 그러다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꼴깍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해가 사라진 마을은 깊은 동굴처럼 아득했다. 한 치의 여분도 남지 않은 냉랭한 어둠과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되어버린 듯 깊고 깊은 적막함. 어둠에 묻힌 산 너머 멀리에서 기적이 울었다. 소나무 숲 어딘가에서 부엉이도 울었다. 그럴 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소년의 갈비뼈를 뚫고 올라와 숨을 막았다. 그날도 그랬다.

어둠 속에서 기적이 울자 소년은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려 슬며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내자식이 그리 눈물이 많아 어디에 쓸 거냐며 혀를 차는 할머니도 이미 잠이 들었건만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이나 그렇게 숨을 참았다. 그런데도 올라오는 설움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계집애들만 눈물이 많은 건 아니었다. 사내애들도 슬픔이 있는 건 다 똑같았다. 바늘 하나 툭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요 속에 할머니는 가늘게 코를 골았다. 그 사이로 계곡을 휩쓸어 마당을 돌던 바람이 문풍지를 헤집었다. 

바로 그때였다. 괴이한 소리가 소년의 귀청을 때렸다. 앉은뱅이책상이 놓인 봉창 너머였다. 소년은 그것을 자신이 잘못 들은 소리려니 했다. 문풍지를 헤집는 바람이겠거니. 헌데, 아니었다. 크크크, 숨을 참는 웃음과 함께 문살을 툭 뚫고 들어오는 그것. 팽팽한 창호지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주우욱 찢겨 나갔다. 놀랍게도 백골처럼 앙상하게 마른 하얀 손가락이었다. 아니, 그것은 확실치 않았다. 괴이한 뭔가가 문살을 뚫는 순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던 것이니.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손바닥만 한 넓이로 찢긴 문을 밥풀로 짓이겨 붙이면서도 소년이 꿈을 꾼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소년도 자신이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문을 찢는 꿈.

그날 아침. 산을 넘는 차창 밖으로 희부연 안개가 솜사탕처럼 피어올라 왔다. 산을 넘고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서자 안개는 하얀 포말의 바다로 눈 아래 첩첩 산들을 말끔하게 감춰버렸다. 갤갤 지친 숨을 토해내며 산을 오르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수많은 물방울이 맺혔다 흩어졌다. 소년은 안개가 그대로 버스를 삼켜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안개의 늪에 갇혀버렸으면.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종석산 아래 외가에 도착하는 사이 하늘은 파랗게 날을 드리웠고 외가의 탱자나무 울타리 안엔 하얀 감꽃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며칠만 있으면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 그때까지 외할머니 말씀 잘 듣고……”

애써 모자를 눌러 쓰는 시늉으로 소년의 눈을 피하는 아버지의 눈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토끼 눈처럼 붉었다. 그 때문에 소년은 차마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소년은 마당에 뒹구는 하얀 감꽃들만 발밑에 지그시 짓이겼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아버지는 눌러 쓴 모자를 벗어 그것을 애꿎게 비틀어 짜냈다. 아버지의 손 등 위로 툭 불거진 힘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올이 뜯어진 볼품없는 털모자가 힘줄 아래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밤. 아버지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돌아 누운 사이로 아버지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고역이었다. 밤이 깊도록 방문 밖에서는 감꽃들이 양철지붕 위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어둠 속 산 너머에는 어미를 잃은 송아지 울음의 기적 소리가 새벽까지도 이어졌다. 방바닥에 엎드린 소년의 가슴 아래로 뭔가가 좌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다 소년은 깜박 잠이 들었다가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에 화들짝 이불을 걷어차 냈다. 아뿔싸, 아버지는 이미 희부연 새벽안개를 뚫고 외가의 외딴집을 떠난 뒤였다.

그때가 소년의 초등학교 2학년. 그날 이후로 소년에게 감꽃은 뭐라 이름 지을 수 없는 특별한 꽃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그토록 많은 꽃이 떨어졌는데도 감은 가지가 감당 못하게 열렸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훌쩍 넘고도 길 아래로 가지를 낭창하게 뻗어 내렸다.

“내년 다시 감꽃이 필 때쯤이면 니 애비가 꼭 널 데리러 올 거다.”

찬 서리가 내리고 감이 무르익자 할머니는 감들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옮겨 담으며 소년이 오던 그날처럼 감꽃이 피면 소년의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또다시 감꽃이 피고…… 두 해가 흘렀어도 아버지에게서는 그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해. 할머니도 더는 아버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소년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가면서도 엄마의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학교에 가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누가 부모 없는 자식이라고 놀리거나 때리거든 바보처럼 얻어맞지 말고 호랑이처럼 물어뜯어 놓으라는 말도 했다. 이 할매가 뒷감당은 다 할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도 소년은 여전히 보따리를 풀지 못하는 나그네처럼 외딴집 탱자나무 밖을 서성거렸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시간이면 더욱더 아버지가 간절해져 어둠이 소년을 삼키도록 좀체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잊었을 게 분명한데도 소년은 그렇게 아버지가 그리워 외할머니 집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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