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꽁지새

정체 모를 뭔가가 창호지를 뚫던 그 꿈을 잊지 못한 탓인지도 몰랐다.

자작나무숲이었다. 발밑에 스치는 풀잎들에서 싱그러운 향이 맡아지는 기분 좋은 숲이었다. 누군가가 그 길을 하얀 숲이라고 소년에게 속삭였을 때 소년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그 말을 되뇌기까지 했다. 숲에 딱 맞는 이름이었던 것이니. 아니, 그래서가 아니었다. 자작나무 숲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수천 번도 넘게 봐 온 길처럼 하늘에 닿을 듯 커다란 자작나무들이 소년의 숨을 차오르게 했다. 자작나무 사이로 부챗살처럼 내려그어진 햇살도, 나뭇가지에 부딪혀 부드럽게 살랑대는 바람도, 가지 끝에 매달려 팔랑팔랑 춤을 추는 잎사귀들의 작은 소요까지도 소년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숲길은 금방 끝이 났고 그 길 끝에 선 소년은 깜짝 비명이었다. 놀랍게도 땅에 납작 엎드린 오두막이었다. 그리고 하얗게 꽃을 피운 감나무.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높게 솟은 감나무에서 감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와! 감꽃이다!” 그때 누군가가 소년의 팔을 흔들었다.

“야야, 용아! 뭔 잠꼬대를, 또 니 애비 꿈을 꾼 거냐? 올 것이여, 돈 많이 벌어 널 데리러 꼭 올 거여, 그럼, 꼭 오고말고.”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소년을 흔드는 탓에 그 꿈은 거기까지였다. 잠을 깬 소년은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년이 잠들지 못하는 문밖에선 전선을 타는 바람이 밤새 귀신처럼 흐느꼈다.

다음 날 아침, 집이 온통 꽁꽁 얼어붙어 붙잡는 것마다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산 아랫동네도 꽁꽁 얼어붙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의 굴뚝마다 머리를 풀어헤친 연기가 정신없이 하늘로 치솟다가 금세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소년은 얼어붙은 산 아래의 모습을 내려다보다 앙상한 감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내년 감꽃이 필 때면 아버지가 꼭 널 데리러 올 거다.’ 소년은 그 소리가 마치 들리기라도 한 듯 감나무의 밑동을 힘껏 발길질했다. 그때였다. 헛간을 돌던 할머니가 깜짝 소년을 불러 세웠다.

“오매! 용아, 요것이 뭔 일이다냐? 이리 조께 와 봐라, 시상에, 날이 얼마나 추웠으면 이것이……?”

붉은 꽁지새였다. 왜 하필 그것이 헛간에서 얼어 죽었는지 자작나무 숲에 둥지를 튼다는 새가 날갯죽지를 헛간의 나뭇단에 걸친 채 꼼짝을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 모른다며 새를 아궁이 가까이에 뉘었다. 그러나 새는 이미 숨이 끊긴 지 오래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녀석을 마당 건너 대숲으로 던져버렸다.

“쯧쯧 아침부터 재수 없게……”

그러나 소년은 깜박 잊고 있었던 간밤의 꿈을 생각해 냈다. 하얀 길. 자작나무 숲길. 정말 이 산 어딘가에 그런 숲이 있는 것인가?

*

할머니는 애써 굽은 허리를 들어 올려 탁탁 낫질을 하다가도 소년을 돌아보며 서글픈 웃음이었다. 일부러 종석산을 피하느라 멀리 돌아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소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할머니가 애써 시치미를 떼도 소년은 자신의 엄마가 묻혀있는 종석산 기슭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서 보는 엄마의 묘지 위로 손바닥만큼 남은 하얀 눈이 시리게 들어왔다. ‘추울 텐데’ 소년은 아까부터 그것을 쓸어내 주고 싶다는 생각에 걸음이 느려졌다. 할머니가 잠깐 삭정이 따는 것에만 신경을 쏟는 시간이면 되었다. 아니, 어느새 소년은 뒷걸음질로 할머니와 거리를 넓혀 엄마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산 아래로 하얗게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모습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계곡 아래로 휑하게 잎이 진 하얀 나무 군락지였다. 놀랍게도 어젯밤 꿈에서 봤던 바로 그 자작나무 숲이었다. 자작나무들 사이로 납작 엎드린 슬레이트 지붕이 꿈속에서처럼 환한 빛이었다. 자작나무들이 일제히 잔가지들을 떨며 소리를 일으키는 것도, 붉은 꽁지새들이 자작나무 사이를 높이 날며 부산을 피우는 것도 간밤의 꿈과 똑같았다.

소년은 자작나무 숲을 향해 계곡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년이 계곡을 타기엔 역부족이었다. 깎아지른 바위벽을 타던 소년은 비명과 함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바위틈에 걸려 미처 빠지지 않은 소년의 신발 한 짝도 소년을 따라 절벽 아래로 곤두발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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