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스트=김경배 국장] 암살의 역사는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국가조직의 형태를 갖추고 그 나라의 통치자가 나타나면서 권력투쟁에서의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살해 사건은 그중 대표적이다.
갈리아 원정을 통해 현재 프랑스인 갈리아지역을 평정했으며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독재관에 오른 그는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브루투스 등이 주동이 된 공화정 옹호파들의 칼에 찔려 쓰러졌는데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와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은 현재까지 대중에게 회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공민왕이 1374년(공민왕 23년)에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공민왕의 죽음이 아직까지 이야기되는 이유는 그가 고려 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었다는 점,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의 사례에서 볼 때 카이사르의 경우 정치적 경쟁자였던 공화정 옹호 파에 의해 운명을 달리 한 반면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 아는 최만생이 위기감을 느껴 공민왕을 시해했다고 한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개인의 생존을 위해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암살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assassination'이라 하는데 이 단어는 아랍어인 ’hashishin'에서 유래했다 한다. 하시신이란 마약의 일종인 하시시를 먹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11세기말 하산 사브라가 페르시아에 소수정예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한 후 이들에게 하사시를 주어 정부요인을 암살하게 했는데, 이 암살단이 십자군에 의해 유럽에 알려지게 되어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암살에 의해 명을 달리한 인물은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시대 해상왕이라 불리는 장보고, 후고구려의 궁예, 서경천도론의 주인공 묘청, 고려조 마지막 충신으로 불리는 정몽주, 4군6진의 개척자 김종서와 김좌진 여운형 김구 장준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운명을 달리했다.

중국을 살펴보면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하진, 동탁, 장비 등이 부하나 환관 등에 의해 암살됐으며 신나라 건국자 왕망, 수문제 양견, 당나라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 중국 오대 후량의 건국자 주전충, 중국 명말기 농민반란지도자 이자성 등이 대표적이다.
서양은 카이사르의 라이벌이었던 폼페이우스,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 친위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오스만의 젊은 술탄 오스만 2세, 30년 전쟁당시 친황제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스웨덴의 전성기를 연 구스타브 3세 등이 그들이다.

근현세를 살펴보면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F.케네디 대통령,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혁명가 체 게바라, 미국인권의 상징 마틴루터 킹 목사, 팝음악의 전설 존 레논,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라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맞선 보리스 넴초프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암살의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벤자민 존스와 벤자민 올켄은 <성공이냐 실패냐?>라는 제목으로 암살 통계를 다룬 하버드 대학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에 따르면 1875년과 2004년 사이에 도합 298건의 암살이 시도되었지만 그중 59건만 성공했다고 전한다. 대략 20%의 확률이다. 이들은 또 전 세계에서 “1950년 이래 거의 3년마다 두 건씩의 국가적인 지도자 암살 사건이 발생해 왔다”고 지적했다.

암살의 특징은 정치적 목적으로 실행된 살인이라는 점이다. 암살의 대상은 주로 정치적 라이벌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정적 제거 수단으로 암살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도 있지만 최근은 사형제도 폐지가 대세이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법적측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하지만 인간생명의 존엄성 측면과 오판의 가능성, 정치적 악용의 가능성 등을 근거로 해서 폐지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호하는 암살이 있을까? 암살에 환호하려면 암살대상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이해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빈 라덴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김좌진 김구 장준하 등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을 가지고 있다. 그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암살은 그 절차상의 문제점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들의 이목을 끈다. 평범하지 않는 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암살을 시도한 측에 대한 비난보다 죽음과 향후 전개방향등에 대해 더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최근 김정일의 큰아들이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암살되었다 한다. 어느 세력에 의해 암살이 이루어졌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지만 누구의 소행일 것이라고 대부분 예상하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암살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이나 장준하 추락사고 등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암살도 엄연한 살인이라는 점이다.

과연 암살에도 정당성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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