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충남문학관 관장 / 작가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이재인]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는 더러 명가 고택을 만나게 된다. 우선 이런 고택은 나이가 보통 이, 삼백년이나 되어 마치 넉넉한 어른을 뵌 것처럼 느껍고 든든하다.
이런 기분이 들게 된 연유는 아마도 이 명가 고택이 대체로 휴먼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참으로 귀하고 매력적이다. 요즘처럼 각박하고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한테 전하여 주는 미담은 교훈적이면서도 지녀할 건강한 시민의식이기도하다.
 
대개의 명가 고택들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이들 명가 고택들은 숱한 외세의 침입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명가의 주인이 국란이나 재난 환란 중에 자기 곳간을 열어 구휼미나 독립군 군자금을 대주고 가난, 흉년을 만나 굶주리는 백성을 돌본 집이라는 것이다.
기실 몽고의 침략 그리고 임진왜란, 청나라 침입,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거개의 고택들은 거의 불타거나 소실되어 이름 있는 목조 문화재는 그 종적을 감춘지가 오래되었다. 그런 와중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고택들은 우리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소리 없는 언어로 속삭이고 있다.
 
조선시대 기와집을 지닌, 양반이나 수령, 현령과 같은 귀족계급 중에는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한 사례가 역사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다산 선생은 ‘호적’ 그리고 ‘목민심서’에서 검소와 더불어 이도사상을 천명하는 글을 남긴 것이다.
 
우리한테 익숙한 명가고택으로 존재하였던 ‘돈암장’이란 기와집이 아직도 우리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미곡 취급으로 큰돈을 번 강익하씨 부부는 6.25 그 전쟁 중에 고아 900명을 돌본 선행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집이 바로 ‘돈암장’이란 고택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그 이름만 남아 있어 전란 후의 사연이 궁금하다. 더욱이 이 고택은 옛날 궁궐 양식에 고래등 같이 커다래서 동소문밖까지 이름난 명가였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우리는 이런 고택이 지닌 스토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요즘처럼 부의 편중이 심화된 시대에 옹달샘 같은 미담이다. 고택의 소유자들은 대체로 남모르는 선행을 베풀었다. 이를 가리켜서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한다. 이런 전통과 선행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충청도 홍성에 조선시대 기호학파의 대표학자이면서 5개 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그분의 전승 사운고택(士雲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8호)이 있다. 일명 우화정이라고도 불리는데 최근 그분의 "충정공유고집"이 출간되어 지역사회에 잔잔한 미담이 되고 있다.
이 고택의 선조 조중세 관찰사는 문경현감 시절 자신의 곳간을 비워 임진년 나라안팎에 환난 때 공급한 구휼미가 마차로 몇 십수레였다니 듣기에도 시원한 미담이다. 당연히 고택 주인의 문집 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지만 이런 아름다운 선행 스토리도 지자체에서 향토학 시리즈로 발간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고택이 각 고을에 존재함은, 그리고 그 명가가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에 전해지는 데에는 우리에게 오래오래 기억되는 선행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이재인
소설가
전 경기대교수
충남문학관 관장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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