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숲의 오두막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내쉬는 얕은 숨소리만 있었다. 그 숨소리가 점차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쯧쯧, 저쪽으로 가 있어라!”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다가서려던 숨소리가 미끄러지듯 소년에게서 멀어졌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누, 누구세요?”

“오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갑네?”

이번에도 같은 목소리였다. 소년은 소리를 향해 길게 목을 빼 올렸다.

“안보여요. 암 것도 안 보여요?”

“야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저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짐서 니 이마빡이 깨져 버맀다. 그리도 이만허길 천만 다행이지, 시방 머리를 싸매놔서 그렁게 쫌 참어 봐라.”

그제야 소년은 자신의 머리가 뭔가로 칭칭 감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그 느낌을 따라 자신의 이마를 더듬었다. 어둠 속의 여자가 그런 소년의 손을 치우고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럼 눈만 나오게 살째기 풀어보자.”

그 순간이었다. 여자의 손놀림에 눈앞이 환해지는 그 순간.

“아 앗?”

“어뗘? 인자 앞이 좀 비냐?”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어?”

“그려, 솔찬히 아플 것인디 그리도 금방 아물 텐 게 크게 걱정할 건 없다.”

“어, 엄?”

엄마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봐도 엄마였다. 어쩌면 또 꿈인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눈물이 소년의 볼을 타고 내렸다. 여자가 느껴우는 소년을 황급히 쓸어안았다. 그것에 소년은 더욱 설움이 북받쳐 목청을 돋웠다. 그러다 그만 까무룩 잠에 빨려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뭔가 낮게 칭얼대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생각뿐, 소년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대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 붙은 사선의 선들이 기이한 형태로 날았다. 할머니의 기다란 허리끈이 되었다가 토방을 기는 징그러운 지렁이가 되었다가 아버지의 낡은 모자가 되어 하얀 감꽃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어 그 모든 것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선의 엉킴으로 소년의 눈앞을 오르내렸다. 어지러웠다. 소년은 사르르 눈을 감아 이불에 얼굴을 쑤셔 넣었다. 그때 이불 속 까실한 뭔가가 소년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털스웨터였다.  엄마가 낡은 스웨터를 풀다가 그대로 밀쳐 둔 모양이었다. 이불 밖으로 끌려 나온 털스웨터의 목이 반이나 풀려있었다. 그것을 무심히 머리맡으로 휙 던지려던 소년의 얼굴이 일순간 하얘졌다.

언젠가도 엄마는 소맷부리가 다 헤진 자신의 회색 스웨터를 지금처럼 풀어냈던 것이니. 그리고 그것으로 아버지의 털모자를 짜냈던 것이니. 아버지는 그것이 세상에 둘도 없는 모자라며 겨울마다 그것을 즐겨 썼었던 것이고. 그러다 그해 겨울 공사판에서 허리를 다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바람에 엄마는 아버지 대신에 공사판의 식당일을 해야 했었고, 그리고 결국엔 술 취한 아저씨의 트럭에 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날 자신은 학교에서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나머지반에 남겨진 날이었고. 그것이 부끄러워 돌멩이를 걷어차며 집으로 돌아오다 불 꺼진 싸늘한 방에서 엄마의 소식을 들었었다. 아아, 그 일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꿈에 본 것인지 몰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소년은 재빨리 이불을 걷어차 냈다. 그런 재수 없는 털스웨터는 일찌감치 엄마의 눈에 띄지 않게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그때 소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빠끔히 열린 문으로 엄마의 얼굴이었다.

“아이고, 내 새끼 일어났구먼!”

소년을 안아 일으키는 엄마의 품에서 풋풋한 감꽃향이 올라왔다. 엄마의 향기였다. 엄마는 그것이 어릴 적 감나무에 매달려 자란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의 고향 마당에는 엄마보다 더 오래 산 늙은 감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봄이면 감꽃을 피어 명주실에 꽃목걸이를 만들게 했고 겨울밤이면 부엉이의 튼실한 둥지가 되어주었다고. 그 때문에 엄마의 몸에서는 늘 감꽃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엄마의 감꽃 향기에도 소년은 밀려오는 잠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잠은 한도 끝도 없이 소년을 빨아들였다. 끈적하고 아늑하게. 지금껏 쉽게 잠들지 못했던 날들의 보상인지도 몰랐다.

그 깊은 잠의 수렁에서 잠깐 눈을 떴을 때 창호지 안으로 붉은 석양빛이었다. 그때야 소년은 엄마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방안에 있다는 것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른쪽 구석으로 종잇장처럼 새하얀 얼굴이었다. 소년과 엇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몹시 깡마르고 눈이 큰 여자아이.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여자아이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에도 소년은 자꾸만 내려누르는 그 무거운 눈꺼풀에 다시 잠에 떨어져 내렸다.

다음 날, 그 무거운 잠에서 소년을 깨운 건 새소리였다. 살며시 열린 문틈으로 어제 본 소녀가 새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쳐 하늘로 들어 올릴 때마다 붉은 꽁지새들이 번갈아가며 소녀의 손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소녀와 새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유리알처럼 부서져 내렸다. 맞은편 산 위에선 새하얀 양털 구름이 부드러운 거품으로 일어섰고. 그 모습에 소년은 깜박 잊고 있었던 털스웨터를 생각해냈다.

다행히 털스웨터는 소년의 머리맡에 그대로였다. 소년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그것을 가슴에 품고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소녀의 눈을 피해 한달음에 자작나무숲으로 내달렸다. 털스웨터만 없어지면 앞으로 그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을 터. 자작나무숲 한가운데 이른 소년은 팔에 힘껏 힘을 실어 스웨터를 계곡 건너편으로 던져 넣어버렸다.

다음 날도 일찍 일을 나간 것인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만이 앉아서 공깃돌을 까불어댔다. 돌을 집는 소녀의 가는 손가락이 희고 날렵했다. 소년은 문득 그 꿈을 생각해 냈다. 백골처럼 앙상한 손가락이 문살을 찢던 꿈을. 그러나 그것도 잠깐, 소년은 다시 까무룩 잠에 빨려들었다. 잠 속에 잠깐 아버지를 본 듯도 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잠은 깊이깊이 소년을 끌고 들어가 꾸었던 꿈도 생각나지 않게 했다.

한밤이 되어서 잠깐 눈을 뜬 사이로 엄마의 얼굴을 본 듯도 했지만, 그것 역시 확실치 않았다. 그리고 새벽녘, 소년은 이마에 닿는 간지러운 숨에 또다시 눈이 떠졌다. 소녀였다. 커다란 눈망울의 그녀가 소년의 상처 위로 호오, 입김을 불어넣다가 화들짝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당혹스러운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질끈 감은 소년의 눈 안으로 하얀 감꽃들이 어지럽게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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