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 훈수는 다수의 집합적인 지혜 표출이다. 혼자 살아가는 단순 지식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기여하는 지혜의 복합이다. 흔히들 한국 사람들은 정치에 너무 관심이 많다고 한다. 각종 사회 현안에 너무나 예민하게 신경과민적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사건이 터지면 한국 전체가 떠들썩해지곤 한다. 이런 과민 현상에 대한 반응도 극과 극이다.
나라가 너무 좁다보니 자연 하나의 이슈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식의 당연 논리를 펴는가 하면, ‘최순실 게이트’로 시위와 맞불시위로 과열되어 필요 이상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분명한 현실은 각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떤 형태든 훈수가 있게 마련이다. 단, 보는 관점에 따라 본인에게 도움이 되면 생산적인 훈수가 되고, 반대로 귀찮다고 생각하면 ‘잔소리’로 들릴 뿐이다. 달면 받고 쓰면 뱉는다는 말도 있다. 정치판을 위시한 각급 정부가 추진하는 일에도 훈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장기판과 바둑판에는 으레 훈수꾼들이 모이는 현상과 같다고나 할까. 판 앞에는 일반적으로 속칭 ‘내노라’ 하는 일류들이 앉고, 주변에는 어느덧 하나둘 훈수꾼들이 모여든다. 그들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막아서도 안 된다. 그게 장기판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걱정이다. 아니다. 반대로 사공이 적으면 배가 풍랑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 사공이 많아야 배가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법이란다. 시각의 차이일 뿐이다. 衆智중지는 힘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한다고들 한다.

분명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처럼 정부나 정치판에도 곁에서 훈수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한 걸음 뒤로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삶은 우리에게 소중한 힌트를 주곤 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면 막상 게임에 임해 있는 선수가 볼 수 없는 수를 자신보다 더 하수일지라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기가 막히게 훈수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 그 게임에 임하는 당사자는 긴장해 있는 상태라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반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훈수를 잘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훈수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다 관록이 붙어야 훈수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장기판 선수보다 훈수의 수준이 월등한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륜에다 선수들보다 멀리 떨어져서 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철학에서는 Detached Interest라는 표현을 쓴다. 이해관계가 깊을수록 관심이 많을수록 멀리 떼어놓고 보란 의미이다.

누구나 삶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설적으로 삶에서 한번 벗어나보기를 권한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선 산에서 멀리 떨어져 보아야하는 것처럼. 어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나, 막막하게만 느껴질 때는 계속 그 문제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다보면 자칫 ‘捨樹而走長林사수이주장림’이란 늪에 빠지기 쉽기에 말이다.
멀리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무(樹) 하나 하나를 버리며(捨) 지나면서 미쳐 그들이 숲으로 보이지 않기에 그냥 지나쳐 버리고 보니 다 지난 후에야 비로서 자신이 긴 숲(長林)을 지난줄(走)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는 일깨움이다.
 
이 혼탁한 ‘최순실 게이트’ 시대에 ‘捨樹而走長林의 우愚를 반복하고 있는 듯한 정치권의 행보를 보며 한국사회를 지키고 싶은 사각지대死角地帶의 파수꾼(watchdog)임을 즐겁게 자임自任하며! ‘멀리 떨어져 보기‘를 외쳐본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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