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메르스, 무너진 신뢰…최순실, 드러난 국정농단 실체

지난 2013년 25일 국회에서 열린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모습(사진=뉴시스=뉴스포스트DB)

박빙 속 승리, 부정선거 불신 불안한 시작
혼돈과 불안 속 탄핵국면, 파면으로 종결

[뉴스포스트=최병춘 기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의 뜻에 부응하여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이뤄낼 것입니다. 부강하고,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박근혜 前 대통령 취임사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3년 25일 취임식에서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 세가지를 강조하며 ‘국민행복시대’를 약속했다. 하지만 결국 박근혜 정권은 보장된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기대했던 소통과 통합은 불통과 분열의 기억만 남겼고 문화융성은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사건에 의미가 퇴색됐다. 취임부터 파면까지 박근혜 정권의 집권 4년 역사를 되짚어 봤다.

 

2013년 始: ‘첫 여성 대통령’

아슬아슬한 승리와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2013년 2월 25일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했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였던 문재인 전 대표와의 승부에서 51.6%의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됐다. 48.0%의 득표율을 거둔 문 후보와의 격차는 2.6%에 불과했다.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집권 초기부터 정당성과 관련해 의심의 눈초리를 한몸에 받았다.

취임 첫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었다. 당시 국정원의 야권 주자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이는 부정선거 주장으로 확산됐다.

이에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발경찰청장을 불구속 기소하며 사실상 관련 혐의를 인정하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수사를 이끌던 윤석열 수사팀장의 외압 폭로에 이어 당시 수사지휘 총 책임자였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식 문제로 불명예 퇴진이 이어지면서 정권차원의 수사방해 의혹은 더욱 커졌다. 재판결과도 지난 2015년 7월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결정한 이후 가정보원 1년7개월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끝내 의혹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하면서 정권 내내 부담으로 남겨둔 셈이다. 이와함께 박 전 대통령은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 방미 수행 중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취임 첫해부터 인사 문제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인사는 이후에도 박근혜 정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2014년, 충격과 슬픔

세월호 참사 정윤회비선실세 논란

 

박 전 대통령 취임 두 번째 해에는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가 촉발되는 계기가 됐다. 탄핵심판이라는 국가적 비극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지금까지 박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묻고 있고 이는 탄핵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배경과 원인은 아직까지 의혹속에 뭍혀있는 가운데 당시 박 대통령의 대처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지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국민들이 슬픔에 빠진 사이 수사당국은 세월호 선주인 유병언 회장을 쫒아다녔고 결국 시신을 찾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박 전 대통령은 참사가 난지 한달이 지난 5월 19일에서야 눈물의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지각 사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 될 때까지 무려 205일이라는 시간 동안 여야는 극렬하게 다툼을 벌였다.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지만 활동 내내 정부는 조사 방해 의혹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충분한 지원 속에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체 사실상 중단됐고 세월호는 아직까지도 인양되지 못했다.

집권 2주년차에는 인사문제가 본격적으로 화두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밝혔지만 총리 후보자이 각종 의혹으로 낙마되면서 사퇴를 선언한지 296일간 자리를 지키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거듭된 총리 인사 문제로 박근혜 정권은 ‘불통 인사’ 비판에 직면하게 됐고 인사검증 시스템은 불신을 받게됐다.

그리고 연말 정국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이 공개되면서 들썩이게 된다. 지금에서야 국정농단 사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청와대 문건 유출에 따른 국기문란 사건으로 다뤄졌다.

논란의 시작은 2014년 12월 28일 세계일보의 청와대 감찰 보고서 입수 보도였다. 최순실씨의 전 남편인 정 씨가 비선실세 핵심이라는 의혹이 촉발됐다. 공개된 문건에 정 씨와 이른바 ‘십상시’라 불리는 청와대 측근 그룹의 실체가 거론되면서 ‘비선실세’ 실체에 대한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정호성, 안봉근, 이재만 청와대 비서관,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실체에 대한 의혹도 이때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비선실세 의혹’은 청와대가 해당 의혹에 대해 ‘지라시(증권가 정보지)’ 수준으로 규정하고 문건 유출 과정을 문제삼으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검찰에 문건 작성자이자 유출자로 의심되는 경찰 출신 전직 행정관을 검찰에 고소 및 수사 의뢰했고 검찰은 이에 맞춰 수사했다. 이 과정에서 문건 유출 혐의를 받던 최 모 경위는 지난 13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고 박관천 경정의 원맨쇼로 점정 결론이 내렸다.

같은해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나왔다”는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의 언급은 부메랑이 되어 헌정 사상 초유의 당 강제해산으로 귀결된 셈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 전 대통령의 당선 2주년이었다.

 

(사진=뉴시스=뉴스포스트DB)

2015년, 불신의 증폭

메르스 공포와 성완종 리스트

 

세월호 참사 비극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바로 다음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초유의 메르스 사태로 38명이 사망하고 1만7000여명이 격리되면서 우리 사회는 감염병 공포에 휩싸였다.

메르스 첫 확진 환자가 발생한 5월 20일 이후 메르스로 인해 2000곳이 넘는 학교가 휴업·휴교를 단행했으며 한국을 찾는 여행자 수가 줄어들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거나 외출 자체를 꺼렸다. 세월호에 이어 경기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큼 사회적 파장은 컸다.

특히 메르스 병원에 대한 공개를 미루면서 많은 시민들의 불안이 고조됐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미온적인 초기대응이 메르스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정부의 책임론이 불거졌다. 허술한 방역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고 세월호 참사에 이어 박근혜 정권의 안전의식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촉발된 계기가 됐다.

이후 2016년과 2017년으로 이어지는 경주 대지진, 조류 인플루엔자(AI)과 구제역 확산으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집권 3년차, 박근혜 정권을 위협할 만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이 북한산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던 성 전 회장이 돌연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MB맨이 아니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한 뒤 바로 다음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문제는 당시 성 회장이 숨지면서 남긴 쪽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에 핵돌풍을 몰고 왔다. ‘성완종 리스트’에는 성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에게 로비자금으로 건냈던 돈의 액수와 실명이 적혀 있었다. 그 중 8명의 친박계 핵심 의원들이 등장했다. 박근혜 정권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당시 정면으로 측근을 향한 의혹인 만큼 파장 또한 컸다. 파장은 박근혜 정권의 대산자금 의혹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엿보였다. 하지만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친박계로 분류된 핵심 인물들은 재판을 받지 않은 체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와 함께 2015년에는 정원 직원 임모(45)씨가 경기도 용인시 한 야산에서 자신의 마티즈 승용차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국가정보원이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핵심 역점사업 중 하나인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하다. 당시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015년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했다.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은 현행 검정에서 국정화 전환은 이른바 ‘박정희. 친일 찬양’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겨룪 올해 국검정 혼용으로 변경됐다. 당장 시범 보급에 신청한 학교도 한 곳에 그치는 등 사실상 무산 위기에 놓였다.

 

(사진=뉴시스=뉴스포스트DB)

격동의 2016년

새누리당 대참패 최순실게이트 발발

 

박근혜 정권의 집권 3년차는 말 그대로 격랑의 시기를 보냈다. 그동안 잠재됐던 정권에 대한 우려와 불신은 20대 총선 참패라는 결과로 드러났고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던 비선실세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의아했던 박 대통령의 태도와 정권의 정책의 실마리가 속속 풀리기 시작한 사이 박 대통령은 탄핵소추라는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2016년 4월 치뤄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새누리당의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 16년 만에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형성됐다. 김무성 전 대표의 ‘옥쇄파동’까지 벌어지는 등 공천 심사 과정에서 보여준 최악의 시나리오로 과반 의석수 확보에 실패한 새누리당은 122석을 차지해 123석을 따낸 더불어민주당에 원내 제1당을 내어주며 엄중한 유권자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새누리의 총선 패인으로 정부는 책임론이 부상하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조기 레임덕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7월 국정농단 사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이름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당시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회장과 연루된 법조비리가 세간의 이목을 받으면서 그 파장이 우 전 민정수석까지 덥쳤다. 우 수석은 서울대학 동기인 김정주 넥슨 대표와의 연관설 등 각종 부동산 의혹과 친인척에 얽힌 비위 의혹까지, 그리고 박근혜 정권 사정 장악의 핵심인물로 본격 등장하며 야권의 집중적인 퇴진 요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9월 시작된 20대 국정감사에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실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최순실의 존재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의혹만 난무하던 비선실세 최순실의 실체를 증명한 테블릿PC의 존재가 JTBC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서 국정농단 사태의 서막이 열렸다. 테블릿PC의 존재가 밝혀지기 바로 직전 박 대통령이 국회에 던졌던 ‘개헌카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고 정국은 빠르게 대통령의 거취문제로 옮겨졌다. 대통령의 첫 대국민 사과가 있었다. 그리고 촛불을 든 국민들의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같은해 12월 9일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234표의 찬성표를 얻어 가결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최순실'이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에 개입하고 대통령 연설문 수정과 인사 개입 등 국정 전반을 농단한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촛불 집회의 탄핵 요구는 주저하던 국회를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2017년 結: 헌정사상 첫 대통령 파면

헌재 90일간 달린 탄핵열차, 종착지는 파면

 

국회에서 넘어온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92일만에 헌법재판소를 통해 ‘대통령 파면’이라는 답으로 귀결됐다. 헌법재판소는 10일 “박 대통령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봐야 한다”고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언했다. 4년여에 걸친 집권을 마무리 짓고 박 전 대통령은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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