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산의 봄

다음 날, 날이 밝자 세상은 온통 눈이었다. 밤새 감나무 위에 앉아 울던 부엉이의 울음이 눈을 몰고 온 듯 눈은 산마을을 소복하게 덮고 있었다. 그러고도 여전히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모는 서두르자며 마을로 내려가 소년을 업고 온 남자를 찾아 자작나무 숲의 동행을 부탁했다.

“우리 용이 녀석이 저렇게 완강하니 아무래도 확인을 좀……”

“그려, 가는 건 어렵지 않은디, 근디 거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폐가랑게, 대낮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라고. 그런 집에서 저놈이 기어 나왔으니 그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이고 나는 귀신을 보는 줄 알고 하마터면 옷에 오줌을 쌀 뻔했어, 흐흐흐. 헌디. 이렇게 눈발이 굵어지는 판에 산을 넘기는 좀 거시기헌디? 그리도 정 가겄다면 산을 돌아가는 방법도 있응게로 염려허지는 말더라고.”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을 내려 저만치 앞서 서있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아니, 소년은 벌써 그들을 벗어나 눈길을 나는 듯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남자와 이모도 미처 모자를 눌러쓸 틈도 없이 급히 소년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한 그들이 마을을 벗어나 산모퉁이를 도는 동안에도 바람은 간간히 눈보라를 일으켜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런다고 소년의 걸음이 늦추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년의 걸음은 빨라져 또 하나의 산모퉁이 가볍게 돌아서 자작나무 숲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를 올라 쳤다. 그리고 숨이 턱에 닿은 두 사람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구르는 공처럼 눈에 덮인 자작나무 숲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돌 뿌리에 걸린 그것처럼 소년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바짝 다가선 자작나무 숲, 그 자작나무 숲에 있어야 할 오두막이 소년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니. 대신 오두막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땅에 닿을 듯 납작 주저앉아 겨우 지붕만 유지하고 있는 움막이었다. 움막의 흙벽 틈을 비집고나온 마른 풀들 위로 눈이 내려 마치 풀어헤친 백발을 보는 듯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 엄마가, 그 소녀가 있을 리 없었다. 소년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밭에 털썩 허리를 접어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바로 그때였다. 눈물을 쏟는 소년의 눈앞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그것. 비딱하게 누워 제구실을 못 하는 방문 뒤의 어두운 구석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소년 주위로 부옇게 눈보라가 일었다.

이어 눈보라는 오두막 주위를 휘젓고 소년의 눈을 가려 빛을 내던 그것을 순식간에 쓸어 계곡 건너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뒤늦게 소년에게 다가온 이모도 알아채지 못하는 찰나의 일. 다가온 이모는 소년을 가슴에 안고 애써 먹먹한 목소리를 감춰 속삭였다.

“그래, 용아, 네가 여기에서 엄마를 봤다는 것은 정말이었을 거야. 사람이 뭔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가끔은 그것이 생시처럼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니까. 그리움이란 가슴 깊이 간직되어 나와 영원히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을 만큼 간절해지면 내 안에 있는 그것이 가끔은 밖으로 퉁겨져 그렇게라도 볼 수 있게 하는 거니까. 네가 바로 그런 것이었을 거야. 그렇지만 보다시피 엄마는 이제 이곳에 있지 않아. 네 가슴에 있는 것이지. 네 안에서 네가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가길 응원하면서 평생 너와 함께 있는 것이야.”

예상대로 그날의 눈은 폭설로 이어졌다. 눈은 온 천지를 하얗게 덮고도 연 사흘간을 퍼부어댔다. 그 사흘 내내 소년은 심한 고열로 앓아 누웠다. 눈은 나흘째가 되어서야 하늘은 낯을 드러냈다. 소년도 그날에야 몸을 털고 일어났다. 열을 털고 일어난 소년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맑고 고요했다. 파랗게 낯을 드러낸 산골의 겨울 하늘처럼.

봄이 오는 소리는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종석산에서 내려오는 바람도, 골짜기에 얼어붙었던 도랑의 물도, 가지마다 매달려 움트는 나무의 새순도 부드럽고 연하기만 했다. 겨우내 앓기를 반복했던 소년은 그 부드러운 봄의 기운에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이모도 서울로 돌아갈 행장을 차렸다.

“용아, 이참에 이모랑 같이 서울로 가지 않을래?”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소년은 이제 한밤 들려오는 기적 소리에도, 어둠 속 어딘가의 부엉이의 울음도 별로 슬프지 않은 것이니. 자작나무숲 사건 이후로 달라진 소년의 모습이었다. 마치 자작나무 숲이 소년을 불러들여 그 슬픔을 어루만진 그것처럼 이제 소년은 할머니의 눈을 피해 그늘에 숨어 우는 일도, 감나무 밑을 맴돌며 밑동을 차내는 횟수도 눈에 띄게 뜸해졌다.

대신 반짝이는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다 빙그레 미소를 짓고 그러다 훌쩍 산을 한 바퀴 돌아 힘차게 집안으로 뛰어드는 전에 없던 일이 생겼다. 소년이 그 무언가에서 위안을 찾은 게 분명했다. 그 모습에 이모는 안도하면서도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져 또다시 물었다.

“용아, 정말 괜찮겠니? 이런 산속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는 것 말이야?”

그것에 소년은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 그대로 희미한 웃음으로 말했다. 그 빛이 조금은 처연했지만, 전처럼 가슴이 무너지는 빛은 아니었다.

“이모가 말했잖아요. 엄마는 항상 여기 내 안에 있는 거라고. 그래서 항상 날 지켜보며 응원하는 거라고요. 이젠 아빠를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와 사는 이곳이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이모는 이제 내 걱정 안 해도 돼요.”

순간 이모는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느라 닦던 구두코에 재빨리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 이모는 오히려 비벼 떠는 문풍지처럼 떨리는 목소리였다.

“우리 용이 이제 다 커버렸구나. 그래, 엄만 항상 너와 함께 계시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멋진 모습만을 보여드리자. 넌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일을 꿋꿋하게 이겨낸 아이니까. 앞으로 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문제없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이몬 우리 용일 믿어, 그래도 혹 이곳이 따분해지거나 할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지신다 싶으면 아무 때고 이모를 찾아와야 해.”

이모는 서둘러 외딴 집 마당을 나섰다. 마지막 산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손을 번쩍 올려 할머니와 소년에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이모가 그렇게 산을 내려가자 할머니도 호미를 챙겨 급히 텃밭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소년은 그제야 부리나케 몸을 움직여 산등성이를 향해 줄달음쳤다. 이모와 자작나무 숲을 찾던 그날 소년은 분명 뭔가를 보았던 것이니. 움막의 어두운 구석을 튀어나와 눈보라와 함께 계곡으로 사라진 그것을. 어쩌면 그것이 추위를 피해 산에서 내려온 산 짐승인지 아니면 소년의 이마 위에 후욱, 입김을 불어넣었던 커다란 눈망울의 그 누구였는지.

소년이 뒤란을 돌아 종석산을 오르는 동안 할머니의 집의 감나무도 꼬물꼬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분주했다. 벌써 가지마다 푸른 기운이 가득한 것이 올해도 감이 풍년일 모양이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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