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협주곡 1번

바람이 차가웠다. 4월의 날씨치고는 햇살의 인심이 야박했다. 그래도 파릇하게 올라오는 싹들은 굵은 흙덩이를 뚫고 여지없이 생명력을 자랑했다. 기다랗게 골이 이어진 다랑논에도 풍성한 보리 순들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여자는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보리밭 속으로 몸을 낮추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의 눈빛이 밤바다처럼 깊었다. 자박자박 밟혔던 보리 순들이 언제 밟혔냐는 듯 기지개를 켜며 허리를 굽힌 여자의 얼굴을 간질였다. 앞산에서 두견이 울었다. 그 울음에 진달래가 화들짝 꽃술을 늘어뜨렸다. 그 사이를 놓칠세라 벌 한 마리가 늘어진 꽃술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숨 가쁜 향연이었다. 아니, 그것은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스물셋의 생채기였다. 광란의 협주곡과도 같은 생의 날카로운 피치카토.

“정신이 드나요? 다 끝났어요.”

차가웠다. 선뜩한 냉기가 온 전신에 스미는 추위였다. 그 추위 속에 푸른 가운의 여자가 해거름에 전신주를 훑는 바람처럼 바짝 마른 웃음으로 선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배가 좀 아플 거예요. 하지만 그건 다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요. 수술은 잘 되었어요.”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에도 음악은 흘렀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빠르게 이어 달리는 선율은 선경이 가랑이를 벌려 침대에 눕는 순간에도 들렸다. 거칠고 날카롭게 호흡도 가파른 바이올린 협주곡. 현을 끊어치는 날카로운 피치카토의 주법은 의사의 집게가 선경의 몸을 헤집는 시간에도 계속되었을 게 분명했다. 왜 하필 수술실에 그런 가파르고 숨 고르기 어려운 음악을 틀어놓는 것일까. 심술궂은 노파같이 축 내리쳐진 눈에 형편없는 누런 피부색의 집도의(執刀醫). 그 역시 양심에 눈을 감고 싶어서인 것일까. 하긴, 피차간에 부드러운 음악은 그곳엔 무리였다. 선경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깡마른 의사는 조금 전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느냐는 듯 생뚱한 무표정으로 똑똑 액이 떨어지는 링거병을 확인했다. 그러다 의자 밑으로 불거져 나온 벌건 휴지통을 슬쩍 밀어 치웠다. 그리고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만 나가도 된다라는 뜻이었다. 역시나 푸른 가운의 여자가 축 늘어진 선경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 다음 환자 준비시킬까요?”

선경을 부추겨 문을 나서던 푸른 가운의 여자가 이번엔 돌격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기운차게 물었다.

“그래요, 다음 환자 준비시켜요."

그러니까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선경이 수술실을 나와 병원 문을 나서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독성 강한 바이러스처럼 그렇게 선경의 숨 안을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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