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환 전 관훈클럽 총무, 칼럼니스트

[뉴스포스트 전문가칼럼=구월환] 며칠 전 서울 삼성동 박근혜 전대통령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가 떠난 집 부근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10여명이나 될까말까한 노란 제복의 경찰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 잃은 2층 양옥 집 뜰에는 완연한 봄기운을 맞은 백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의 모친 육영수 여사가 생각났다.
백목련은 비운에 간 그의 모친 육영수여사의 상징물로도 등장했던 꽃이다. 육여사는 인자한 부덕(婦德)이 흐르는 용모와 청와대의 야당이라는 이미지로 좋은 평판을 받았다. 만약 육여사가 그렇게 일찍 가지 않았다면(49세에 갔으니까 생존해있다면 금년 92세다) 박근혜의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따져보면 박근혜의 결혼도, 그의 부친의 재혼도 박근혜를 끼고 돌며 인의 장막을 쳤던 최태민-최순실 일가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박정희는 생전에 일본인 절친으로부터 재혼권유를 받았을 때 한참을 주저하다가 “근혜 때문에…….”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육여사가 재일교포 청년의 흉탄으로 서거한 1974년 이후 박근혜는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가까워졌고 최가 박근혜의 멘토역할을 해왔다는 놀라운 비밀들이 이제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공개되고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는 어머니를 잃고 22세 때부터 퍼스트 레이디역을 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재혼했다면 그 자리를 내줘야 했을 것이고 최태민은 이런 사태를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라는 권력이 없어지면 그의 목표달성은 불가능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치로 박근혜의 결혼도 차단했을 것이다.
박근혜가 만약 결혼하여 남편이 생기고 가정을 꾸린다면 그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결혼을 피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메르켈 독일총리, 대처 전 영국총리 등 많은 정상급 여성리더들을 보더라도 결혼은 좋은 것이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박근혜의 당선 직후 측근그룹의 한 사람이 ‘이제 최태민의 그림자를 지우십시오!라고 하자 ‘이럴려고 저를 도우셨어요?’하며 무안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이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던 것 같다. 최순실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얼씬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공직자가 남의 도움을 받은 것과 그것을 갚는 데는 지켜야할 선이 있다. 감사의 인사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식사도 있고 선물도 있다. 그러나 도와줬다고 해서 공직을 주거나 취직, 납품, 이권들의 청탁을 들어줘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바로 공직자윤리법 위반이다. 이른바 권력의 사용화다. 공인의 권한은 반드시 공익을 위해서 써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자가 지켜야 할 의무다. 공인은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공익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죄가 안 된다고 착각한 것 같다. 최순실이 오랫동안 곁에서 자신을 도와줬기 때문에 어떤 보답이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입장인 것 같다. 공(公)과 사(私)에 대한 감각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내가 아는 누나는 아직까지 자신이 잘못됐다는 인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그의 동생 박지만회장의 말은 이런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의리론이다. 이렇게 공직자로서의 기본이 안 돼있다면 대형사고는 시간문제다.

대체 박근혜는 왜 이런 무분별한 사고를 하게 되었을까. 최근에 알려지고 있는 무수한 보도들은 박근혜가 40년간이나 장구한 세월동안 사실상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포로가 되어있지 않았나.
최씨 부녀가 타인들의 접근을 봉쇄하는 바람에 친구도 친척도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가 고착화되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외신들은 그에게 정치적 공주(political princess)라는 표현을 썼다. 성장기 18년간의 청와대 생활은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작은 실패로 끝났을 것이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실패는 곧 국정의 위기, 나아가서 한국정치에 치명타를 가하게 된 것이다.

구월환(丘月煥)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전 연합통신 정치부장, 영국특파원, 논설위원, 상무
전 세계일보 편집국장, 주필
전 관훈클럽 총무
전 한국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이사
전 MBC재단(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전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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