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우국충정을 중심으로

(사진=만해기념관=뉴스포스트)

[뉴스포스트=신현지 기자]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본지의 ‘역사 톺아보기’에 일제 항거의 대표 인물, 만해 한용운(1879~1944)기념관을 방문했다. 서울 한강을 건너 남쪽의 청량산에 위치한 남한산성이었다. 때 맞춰 4월 초순의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중부고속도로 교차로를 나와 산성로터리의 120여M 골목을 접어들어 남한산성의 초입이었다. 안타깝게도 상춘객들의 발걸음을 먼저 붙잡는 건 즐비한 상가들이었다. 극히 상업적인 그곳을 벗어나서야 겨우내 바람에 신음했을 앙상한 나무군락지들이 봄비에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었다. 빗방울을 단 나뭇가지마다 새초롬한 빛의 20여만 평의 소나무 숲에 만해 한용운의 기념관이었다. 전통한옥 양식인 2층 건물 입구에 만해 흉상이 일제에 항거했던 33인의 얼굴처럼 근엄했다.

1998년 설립한 만해기념관은 2017년 올해로 19년째라고 했다. 당시 신구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전보삼 관장의 오랜 ‘만해사랑'에 의해 설립된 기념관은 대지 520평으로 기획전시실, 교육관, 자료실을 갖춘 전통양식의 2층 건물이었다. 사립문학관치고는 방마다 상당한 분량의 자료들이었다. 특히 자료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제강점기 음서였던 ‘음빙실문집’ ‘영환지략’, ‘월남망국사’였다.

그리고 우리문학사에 희귀본으로 남은 ‘님의 침묵’ 초간본. 만해 관련 연구학술 논문만도 600여 편이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참고로 ‘영환지략’은 청나라 말 세계의 지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세계지도요, ‘음빙실문집’은 청나라 말 구국의 뜻을 품은 학자 양계초의 혁명서였다. 만해가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세계의 정세와 사양철학에 폭을 넓혔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만해의 애국충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승려였던 만해를 심도 있게 조명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일본의 저항 정신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애국충정만을 이 장에 모아보기로 했다. 여기에 먼저 전보삼 관장과의 인터뷰를 청해 듣기로 했다. ‘님의 침묵’에 빠져 중학교 때부터 만해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만해기념관의 계기라고 했으니. 더욱이 그는 만해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심우장에서부터 만해의 자료를 전시해왔던 지독한 만해사랑 표본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심우장에 얽힌 일화만으로 만해의 애국사상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만해는 평생 가난했어요. 그의 나이 55세 집 한 칸 없는 그에게 몇몇의 뜻 있는 사람들이 성북동에 골짜기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는데 집을 짓는 과정에 하필 조선총독부가 내려다보였어요. 이것을 안 만해가 남향으로 세웠던 주춧돌을 북향으로 돌려 일본의 총독부가 보이지 않게 집을 돌려 앉혔지요. 이 일화만으로 그가 얼마만큼 일본에 저항의식이 강했는지 알 수 있지 않아요. 또 변절자들에게는 아주 냉담했어요. 그러니까 심우장 냉골에서 고구마로 끼니를 이어야 할 때 33인 중 변절자 최린이 찾아왔는데 만해는 부재중인 것처럼 꾸며서 최린을 만나주지 않았어요. 최린이 만해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딸 영숙에게 백 원을 쥐여 주자 만해는 노발대발하여 아내에게 그 돈을 도로 돌려주게 했고요. 반면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은 김동삼 장군의 시신은 일본의 감시를 무릅쓰고 수습해서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렀지요. 이런 부분은 만해의 철저한 애민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충남 홍성에서 한응준과 온양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만해가 그토록 애국사상이 투철했던 것은 일찍이 선친의 교육에 의해서였다. 그는 일본의 저항 의식과 관련하여 선친과의 회고를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란 글귀에서 이렇게 남겼다.

“나는 선친에게서 아침저녁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다. 선친은 책을 읽다가도 어린 나를 불러 역사상 빛나는 의인들과 훌륭한 사람들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와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오르고 나도 그 의인 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사진=만해기념관=뉴스포스트)

가족보다 일제 저항이 먼저   

하지만 만해의 두 아내에게는 애국지사가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아니 무척 원망했을 거란 생각이다. 만해의 두 번의 결혼에서 첫 번째인 그의 나이 14세 때의 일. 아내 전정숙의 산고가 있자 그는 미역을 사러 가겠다며 집을 나서 그 길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의 참가가 이유였다. 그 후 아들 보국(輔國)이 장성하여 찾아왔는데도 그는 아들을 냉정하게 쫓아버렸다.

그의 나이 55세 두 번의 결혼에서 맞아들인 간호사 출신 아내 유숙원은 가난한 만해의 뜻을 받들어 삯바느질·빨래 등 막일로 호구지책을 대신해야만 했고. 어디 그뿐인가, 딸 영숙이 태어나자 “일본 통치하에선 절대로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만해로 인해 영숙은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후에 만해의 제자 김관호(金觀鎬)가 가호적을 만들어 그녀를 정식 취학시킬 수 있었으니. 그 일로 아내 유숙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이처럼 만해는 가족보다 일본에 대해 철저한 저항이 먼저였다. 그러니 신간회 시절 공문 봉투에 ‘쇼와(昭和)’란 일본 연호(年號)가 쓰인 것에 대노하여 그 봉투를 모조리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린 것이고

1910년, 국권침탈에 동북삼성에 민족혼을 심다  

일찍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의 격동기에서 힘없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던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10년 국권침탈이었다. 그는 나라를 잃어버린 분노로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독립군의 훈련장을 돌며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했다.

그의 나이 41세에 3·1독립운동에는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여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설득하여 첫 서명자로 끌어들였고. 그러나 육당 최남선(崔南善)과는 갈등을 빚기도 했다. 독립운동 선언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만해는 육당의 선언서를 몇 자 수정한 후 ‘공약 3장’을 추가했다. 선언 뒤에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면서 이른바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제시했다. 즉,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등이었다. 법정의 심문에서 그는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데 왜 일인의 재판을 받느냐”며 오물통을 들러 엎어 대답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42세 때는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독립에 대한 염원은 ‘님의 침묵’으로


뛰어난 시인이었던 그가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26년,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사진=만해기념관=뉴스포스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려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님의 침묵>

 

만해의 ‘님의 침묵’ 낭송대 앞에 한참을 멈추어 섰던 것인지 이를 알아챈 전보삼 관장이 다가와 새삼스럽게 님이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아니, 그 스스로 자문자답이었다.

“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혹자는 국가다, 사랑하는 애인이다. 하는데 만해의 님은 딱 집어 누구라고 지목할 수 없는 거지요. 침묵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온 절대적인 존재가치니까요. 그러니까 침묵을 모르고서는 절대 님을 발견할 수 없는 거지요. 장광설 속에 있는 님은 아니라고요. 그래서 나는 님의 침묵은 시집이 아닌 철학서라고 생각을 해요. 즉, 깨달음의 노래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라고.”

중학교 때부터 ‘님의 침묵’에 빠져 결국 만해 기념관을 세우게 되었다는 그가 위대한 철학가였던 만해의 침묵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절대 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해설에 마침 주위의 서 있던 늙수그레한 관람객이 슬며시 걸음을 멈춰 관장 앞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만해의 철학적 사상을 이해해야만 아무래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요. 만해는 은유와 역설이잖아요. 은유와 역설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들이 그렇게 만해의 ‘님의 침묵’ 앞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동안 <뉴스포스트>는 만해의 다음 행보로 나아갔다.

만해가 신간회를 결성한 것은 그의 나이 49세 되던 해. 그는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역임으로 일제 항거에 박차를 가했다. 신간회는 훗날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의 초석을 이루었다.

1944년 향년 6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

기미년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킨 만해. 자신처럼 민족에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류했으나 변절자 최린, 이광수, 윤치호 최남선 등은 주인에게 충복하는 개만도 못한 놈들로 대노하여 거리를 두었던 만해, 그가 세상을 떠난 건 1944년 6월 29일 조선의 독립을 1년 앞두고 심우장에서였다. 그의 시신은 일본인이 주인인 서울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멀리 떨어진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작은 화장터에서 불교식의 거행이었다. 정부는 만해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만해의 기념관을 돌아내려오는 길목에 ‘나룻배와 행인’의 시비가 봄비 속에서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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