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드레스

대기실은 부산했다. 순서를 기다리는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벽에 걸린 스크린에 눈을 둔 채 무대에 오를 매무새를 가다듬느라 정신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선경이 안절부절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필 핏빛처럼 검붉은 드레스라니.

분명 그날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의상을 선택했었다. 어깨끈이 드러나지 않도록 특별 주문까지도 잊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그런 착오가 생긴 것인지 붉은 드레스였다. 배달된 연주 의상을 미리 확인해보지 못한 게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 그걸 따지고 들 여유는 없었다.

벌써 무대에서는 1막이 끝나고 앙코르곡인 드보르작이 흐르고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율은 몸서리치게 아름다웠다. 소리가 아름다운 건 자신의 숨겨진 비밀이 깊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선경은 속삭이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맞은편 거울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붉은 드레스 여인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때부터였다. 몸이 지탱할 수 없게 심장이 떨리기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의 떨림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 붉은 여인은 어쩜 자신이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번 요동치기 시작한 심장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선경이 무대의 중앙으로 몇 걸음 옮겼을 때 뜻밖에 그 남자였다. 메스를 들어 선경의 가랑이를 헤집던 산부인과 의사. 그가 왜 지휘석에 있는 것인지, 그가 깡마른 무표정으로 선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생명 없는 그림자처럼 휘적휘적 다가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지휘봉을 쳐들었다.

‘자. 이제 시작할까요. 후훗 검붉은 드레스가 당신과 썩 잘 어울리는군요. 그래요. 아주 잘 어울려요. 그런데 감히 순정한 바다빛을 찾다니, 당신은 그날 그 옷을 선택했잖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그 옷은 당신의 옷이에요. 당신이 택한 색이라고요. 흐흐흐.’

무표정에도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에 선경의 손에 들린 활이 선경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몸통을 가르고 지판을 튀어 오르는 현란한 주법으로. 선경의 준비곡이 아닌 파가니니의 협주곡1번이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 괴기스런 재능을 얻었다는 파가니니. 폭풍우를 헤치고 밤바다를 가르는 돛배처럼 활은 광폭하면서도 미끈하게 지판 위를 유영했다.

그것에 객선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 역시 거친 바다로의 항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거기까지였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민망하게도 선경의 붉은 드레스 아래가 온통 진홍빛이었다. 피는 가랑이를 타고 허벅지를 내려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아, 내가 어찌 이리도 끔찍한 옷을 입은 것일까.’ 하지만 선경이 붉은 드레스를 벗어 던지기엔 늦은 거였다.

“아악! 뭐야, 저 저건?”

선경의 가랑이를 타고 흐르는 피에 객석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섰다.

“이 더러운 것, 어디에서 감히 우리에게 그따위 돼먹지 않은 몸뚱이로 눈속임 연주를 하겠다고. 당장 집어치워 썩 꺼져버리라고!”

그런데도 선경은 연주를 멈출 수가 없었다. 활은 선경과는 상관없이 아니,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 팔의 반란이었다. 드레스 역시 숨이 붙어있기라도 한 듯 벗어내려 하면 할수록 선경의 몸을 옥죄며 파고들었다. 객석은 야유를 넘어 성난 황소처럼 거칠어졌다. 투우사를 겨누는 황소. 급기야 그들 중 누군가가 생수병을 무대 위로 던졌다. 선경의 눈앞에 번쩍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연속해서 일어나는 불꽃에 선경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젠장, 그다음은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지금 와 그 일이 꿈인지 아니면 현실의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선경의 연주활동은 끝이었다. 연주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척추의 뒤틀림처럼 몸이 뒤틀려 몸을 바로 설 수 없게 된 것도 그날 이후부터였다. 의사는 대인 공포증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의사는 무대 공포증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자의 병에 그리 허술하게 이름 붙이는 둘 다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처방에도 선경이 다시 무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선경의 삶은 끝이었다. 그런데 그런 선경에게 성모원에 재능기부를 하라니. 처음부터 신부에게 사죄경을 청한 게 무리였다. 어쩌자고 고해성사를 할 마음이 생겼던 것인지, 그렇지만 고해소에 들어갔던 그 순간만큼은 절실했다.

“신부님, 전 죄를 지었습니다.”

“……”

“나, 낙태를 했습니다."

“……”

“하지만 신부님, 저 역시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아니, 벌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 일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 영혼도, 음악도, 아이도. 전 그 일로 여성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불임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전 충분히 죄의 대가를 치른 거라 생각합니다.”

“자매님, 정말 그럴까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데요.”

“딱 한 번의 실수였습니다. 그것으로 엄마가 되다니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전 최고의 연주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세계적인 음악가요. 그 때문에 전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오직 음악만을 위해 숨차게 달려왔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미혼모라니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꿈을 이루셨나요?”

“아뇨, 보시다시피.”

“그럼, 지금이라도 그 꿈을 이루고 싶겠군요?”

“천만에요, 전 그분께 용서를 청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분은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용서를 청하시는 자매님의 죄를 사해 주실 겁니다. 보속으로 자매님이 가진 달란트를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해 주십시오.”

“다, 달란트라니요? 전 그 무엇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줄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음악을 하실 줄 알잖아요.”

“여태, 제 말을 듣지 않으신 겁니까? 지금은 그것이 안 된다고요. 전혀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자매님은 다시 연주할 수 있을 겁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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