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울림

K시는 한적했다. M이 구해 놓은 집은 한적함을 넘어 괴괴하기까지 했다. 이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성당은 주일에만 북적일 뿐 평일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쪽에서 넘어오는 불편함은 요일과 상관없이 한결같았다. 하필 선경의 방이 성모상과 마주해야 한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M의 배려였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마음 켕기는 것은 불편함은 서울에서보다 한층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그 배려를 무시하고 계약을 파기하기엔 늦은 거였다. 성모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창에 커튼을 내리는 수밖에. 그런데도 결국 선경은 그 앞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날 신부의 사죄경까지 청하고 말았던 것이니.

비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장마는 매년 그렇듯 지루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궂은 날씨였다. 비는 창문을 후려치고 그 여세를 몰아 열린 창틈으로 선경의 뒷목을 적셨다. 그래도 선경은 창을 등지고 앉아 맞은편 성당의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성당의 주임신부가 말하는 성모원을 찾아갈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마음에 걸려있긴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솔직히 아직도 그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건지 성모원에 대해서 결정한 것도 없었다. 달란트라니. 그것도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강한 어린 녀석들에게. 설사 그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도 제대로 이루어질지도 의문이었다. 신부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악기를 들 수 있는 몸 같았으면 서울을 떠나 여기까지 내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것들은 자연이나 사람이나 버려진 황무지나 같은 것이지, 그런 연주자의 음악은 영혼 없는 빈껍데기의 울림이라고.’ 누가 그 말을 했던 것인지. 물론 그 말을 한 건 수혁은 아니었다.

그는 한 번도 과거를 빌미로 선경을 몰아세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도 남자였다. 종족보존의 욕망을 가진 한낱 보통의 남자. 선경은 불현듯 수혁을 생각했다.

“초코 이는 닦아줬나? 단것을 먹이고 절대 그대로 놔두면 안 돼. 목욕시키고 드라이로 물기 없이 말린 다음 밖에 내놓는 것도 잊지 말고, 내일 밤 9시 비행기야.”

남편 수혁은 분명 다음날 밤 9시 비행기라고 했다. 홍콩지사에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며 강아지 초코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건조했다. 해풍에 부스스 떨어지는 옹벽의 쓸림같이. 선경은 초코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려다 탁자 위를 긁어내렸다. ‘끼이긱’ 손톱 끝에 닿은 유리가 성마른 소리를 냈다. 수화기 너머로 수혁이 잔기침을 했다. 눈치 빠른 초코 역시 납작 허리를 낮추어 꼬리를 사렸다.

친정엄마는 그런 수혁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자신이 마치 딸의 불임 원인이라도 된다는 듯 엄마는 수혁이 집에 없을 때만 한 번씩 다녀갔다. 그날도 엄마는 수혁이 없는 틈을 타 반나절 내내 부엌에서 몸을 재게 움직였다.

“야야, 너 요새 밥을 해먹기는 하는 거냐. 어째 반찬이 그대로냐? 흐미, 이 고래기 낀 것 봐라, 고들빼기도 그대로고 쯧쯧, 김 서방이 고들빼기 좋아한다고 일부러 담아 논 건데, 깻잎도 그대로고, 너 살림은 제대로 하기는 하는 거냐? 김 서방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하겠냐. 쯧쯧.”

엄마는 냉장고 안을 새 반찬통으로 바꾸어 놓으며 연신 혀를 찼다. 그것이 뭐가 어쨌다고. 선경은 파르르 핏대를 세웠다.

“김 서방 김 서방! 엄마, 제발 김 서방 김 서방 좀 하지 마! 듣기 싫어 죽겠어. 엄마가 김 서방 찬모라도 되우, 왜 그렇게 그 사람한테 저 자세야. 그 사람이 뭔데. 왜 설설 기는 자세냐고!”

꽥 내뱉는 선경의 말에 발끝을 세워 냉장고에 피클 통을 넣으려던 엄마가 말을 더듬었다.

“누, 누가 설설 기긴, 설설 긴다고…….”

그러다 끝내는 말끝을 흐려 눈물을 찍어냈다. ‘속 창시 없는 년, 들여다보면 뭐 좋은 게 있다고 나도 미쳤지.’ 현관문을 횅하니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에도 선경은 그대로 창밖만을 응시했다. 길 건너 담장 너머로 목련이 툭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아렸다. 엄마가 무슨 잘못이라고. 선경은 부랴부랴 자동차 키를 찾아들었다.

하필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엄마를 쫓아가다 말고 선경은 전철역사에 있는 백화점 문을 밀었다. 봄빛에도 엄마의 블라우스는 초가집 추녀 끝에 걸린 고드름처럼 제 빛깔을 잃은 지 오래였던 것 같았으니. 그러다 그를 보게 된 것이었다.

다음 날, 9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한다던 남편 수혁이. 여느 집의 자상한 가장처럼 아이를 품에 안고 웃는 모습이 무섭게 낯설었다. 그 옆에 차분한 단발머리의 여인이 수혁이 안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수혁이처럼 웃고 있었다. 선경은 황급히 연분홍 레깅스의 마네킹 뒤로 몸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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