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지역주의, 탈 많던 대통령선거

[뉴스포스트/대선특별취재팀=선초롱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예정보다 일찍 치러지게 된 19대 대통령 선거가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대선은 역대 최초 대통령 보궐선거라는 점에서 그 결과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뉴스포스트에서는 19대 대선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역대 대선의 흥미로운 숨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청와대 (사진=뉴스포스트DB)

1~3대 대통령 선거(이승만 대통령)

1948년 7월 20일 열린 초대 대통령선거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원수를 투표를 통해 뽑았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다만 지금 대선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많았는데, 일단 대통령 선출권이 국민이 꼽은 제헌국회 의원들에게 있었던 간접선거였으며 별도의 후보자 등록도 없었다.

총 199명의 제헌국회 의원들이 각자가 원하는 국가원수 감을 투표용지에 적어냈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 중 180표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날 선거에서는 무효표도 4표가 나왔는데 미국 국적자로 피선거권이 없던 서재필 박사를 적어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이승만 기념사업회)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8월 5일 치러진 2대 대통령선거는 역대 첫 직선제로 치러졌다. 의원들의 신망을 잃어 재선 가능성이 낮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발췌개헌을 통해 직선제를 도입했던 탓이다.

선거에서는 발췌개헌 당시 정부 차원의 폭력배 동원 등이 논란이 돼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등의 영향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호남 지역에서 상당히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선거는 유력 대선 후보로 불리던 신익회 민주당 후보가 유세 중 심장마비로 급서한 탓에 예상보다 싱겁게 진행됐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헌정사상 첫 3선 대통령에 올랐다.

선거 전 이 전 대통령은 연임제한 철폐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등을 주도하며 민심과 동떨어진 행보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도 작용했다.

또한 당시 대선은 사상 처음 TV를 통해 선거내용과 결과가 보도되기도 했다.

 

4대 대통령선거(윤보선 대통령)

4대 대통령선거는 1960년 3월 15일과 그해 8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3.15 부정 선거와 이에 분개한 국민들에 의해 4.19 혁명이 발발했고 그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며 선거 자체가 무효 처리 됐기 때문이다.

내각제 개헌 이후 치러진 8월 선거는 초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간선제였으며 이번에도 후보자 출마 없이 지지후보에 대한 투표로 진행됐다.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5~9대 대통령선거(박정희 대통령)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은 이후 치러진 5번의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대통령으로만 17년 장기 집권했다.

쿠데타 2년 뒤인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는 다시금 직선제로 진행됐으며, 군사정변 지도자였던 박 전 대통령과 전임이던 윤보선 전 대통령 간 네거티브 공방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특히 사상검증과 친일부역 논란이 거세게 불거졌는데 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남로당 활동 및 만주군관학교 입학 사실이 있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 및 친일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선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승으로 끝났으며 두 후보 간 득표율 차는 역대 최저인 1.5%(15만표)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 당시 군 부재자 투표가 지휘관이 보는 앞에서 진행하는 공개투표였는데 그로 인해 선거결과가 뒤집혀 졌다는 의견들이 상당하다. 또한 군에서는 이후 30년 동안 선거 때마다 공개투표가 진행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박정희 기념사업회)

한 가지 주목해 볼 부분은 5대 대선 때 영호남과 제주 등 남부지방에서 박 전 대통령 득표율이 윤 전 대통령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동서로 분단되는 지금의 지역구도와 확연히 다른 형태의 지역 표심이었다.

1967년 5월 3일 진행된 6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리벤지 매치였으나 결과는 전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진행 등의 영향 속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높았던 덕분으로 이때까지는 군부독재가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지도 않았다.

대신 선거 자체에 대한 관심도는 이전까지 대선 중 가장 낮았던 선거였고 그에 따라 대선 투표율(83.6%) 역시 앞선 선거들보다는 저조하게 나왔다.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7대 대통령선거는 영호남 지역감정과 군부독재가 선거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첫 번째 대선이었다.

3선 개헌을 무리하게 단행하며 3번째 대선 출마를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등에 업고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세가 만만치 않자 학계 등을 동원해 ‘신라대통령’ 등을 언급하며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 역시 ‘호남소외론’ 등을 통해 이에 맞대응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선거에 당시 국가 예산의 1/10 수준에 해당하는 거액의 돈을 살포했으며 김 전 대통령 우세 지역의 투표결과를 전부 무효표 처리 했다는 등의 부정선거 의혹을 사기도 했다.

무엇보다 7대 대선은 유신체제 도입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선거를 통한 장기집권에 위협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제정한 뒤 기존 선거제도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실시된 1972년 12월 15일 8대 대통령선거와 1978년 5월 18일 9대 대통령선거는 형식상의 대선이었다.

관제 주도의 완벽한 간접선거였던 8·9대 대선의 경우 전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천여명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단독후보로 나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가부 투표만을 진행했다.

당연히 박 전 대통령은 99%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됐는데, 100% 당선이 아닌 이유는 일부 대의원이 ‘박정희’의 한자 표기를 잘못 적어 무효표 처리 됐기 때문이다.

 

10대 대통령선거(최규하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고 그해 12월 6일 급작스레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10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이번에도 후보자는 국무총리를 맡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 한 명뿐이었고 그 또한 전임이던 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다만 당선 직후 최 전 대통령은 1984년까지인 법정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이듬해 개헌을 통해 대선을 직접선거로 치른 뒤 자리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으나 이는 12.12 사태가 발발하며 지켜지지 않았다.

 

11~12대 대통령선거(전두환 대통령)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 전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키고 1980년 8월 27일 11대 대통령선거를 개최했다. 이번에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관제 선거였기에 후보자는 전 전 대통령 한 명뿐이었다.

집권 이듬해인 1981년 전 전 대통령은 미국 대선 방식인 대통령선거인단 제도를 도입해 그해 2월 11일 12대 대통령선거를 개최했다. 전국 1905개 선거구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5278명의 대통령선거인을 선출한 뒤 이들이 대선 투표를 하는 방식이었다.

언뜻 보면 민주적인 절차를 지닌 방식으로 여겨지나 그 당시 전 전 대통령은 정적들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을 가택연금 및 공직제한으로 엮어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만든 뒤 선거를 치렀다.

또한 선거에는 전 전 대통령 외에도 3명의 야당 후보가 출마했으나 이들 모두 사실상 들러리에 불과했다. 제1야당이 안기부의 지원을 받는 관제야당이었던 것으로 이에 전 전 대통령은 90.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올랐다.

 

13대 대통령선거(노태우 대통령)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통령선거는 16년 만에 치러지는 직선제 대선이었다.

당시 선거는 여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른바 3김으로 불리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야당 후보간 4자구도로 진행됐으며, 역대 대선 중 가장 치열했던 선거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거에서는 민주화세력의 양대 축이던 김대중·김영삼 간 후보단일화 시도가 선거 막판까지 진행됐으나 결국 무산된 뒤, 지역감정과 북풍의 도움을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깜짝 당선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36.6%였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당선자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이었다.

특히 13대 대선은 지역감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선거로 자주 거론된다. 4명의 주요 후보가 본인들의 텃밭을 제외한 곳에선 공식 유세전조차 펼치기 어려웠으며 정보기관과 공영방송이 지역감정을 더욱 부추쳤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공표되지 않았기에 여당이던 민주정의당만이 시시각각 변하는 여론의 향방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었던 선거였기도 했다.

북풍과 관련해서는 선거를 2주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며 시민들 사이에 안정논리와 색깔론이 급등했고 결국 군부 관리의 한계론 등이 부상하며 야당후보들의 지지세가 급감했던 선거였다. 그리고 이때 세간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연계설 등 흑색루머가 강하게 퍼지기도 했다.

이때 선거와 관련 또 한 가지 주목해 볼 부분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TK(대구·경북) 지역에서 몰표를 받아 당선된 게 아니란 점이다. 노 전 대통령이 이 지역에서 68.1%의 지지를 얻긴 했으나 호남에서 90%이상을 득표한 김대중 전 대통령 정도의 몰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 전 대통령은 경기(41.44%)에서 최다 득표자가 됐으며, PK(부산·경남)와 충청에서도 40% 이상을 득표했다.

선거가 끝난 후로는 컴퓨터 여론 조작설 등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부재자 투표 조작 논락이 불거지기도 했다.

 

14대 대통령선거(김영삼 대통령)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14대 대선은 거대 여당 후보로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과 통합 야당을 이끌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간 마지막 맞대결로 화제가 됐던 선거다.

또한 14대 대선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군인 출신 여당 후보가 사라지고 민간인 출신 후보끼리 맞붙었다는 점에서 군부독재 종식 및 문민정부 출범이란 시대 변화를 보여준 선거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 김대중 양자구도 속에 제3후보였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영남권에서 어느 정도 득표력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쏠린 선거였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연고지였던 PK에서 몰표(73%)를 받으며 당선됐다. PK에서 이 정도 고(高)득표율을 기록한 대선 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유일무이하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당시 선거에서는 지금까지도 정치권에 회자되고 있는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구속수감 중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을 찾아가 지역 정치인들과 만나 ‘우리가 남이가’란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했다는 게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유리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역풍으로 작용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영남권 표 결집에 도움을 줬다.

또한 14대 대선에는 남장 정치인으로 유명한 김옥선 전 의원이 ‘무공약이 공약’이란 이색 공약을 내세우며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 의원은 “지키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며 이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15대 대통령선거(김대중 대통령)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15대 대선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진 선거였다.

선거에서는 대선 4수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국무총리 그리고 여당 경선 결과에 불복한 뒤 출마를 강행한 이인제 전 의원이 맞붙었고, 이른바 DJP연합을 결성한 김 전 대통령이 이회창 전 총리를 힘겨운 누르며 승리를 거뒀다. 당시 1·2위 후보간 표차는 39만여 표(1.6%)에 불과했다.

15대 대선에서는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후보 경선이 이슈몰이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회창·이인제 외에도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들이 줄줄이 경선에 참가해 눈길을 끈 것으로 경선상황을 인기드라마 ‘용의 눈물’에 풍자한 신문만평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이회창 전 총리의 경우 경선 승리 후 직후 대세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아들의 병역 의혹에 한 차례 고비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악재는 여당 경선 2위를 차지했던 이인제 전 의원의 독자 출마 강행으로 그로인해 이회창 전 총리는 보수표 분산 속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때 정적이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손잡은 DJP연합을 결성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당선 후 김종필 전 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자민련과 함께 공동 내각을 구성한 뒤 내각제 개헌까지 이루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중 내각제 개헌은 지켜지지 못했다.

선거전에서는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네거티브성 구호가 여당에 의해 자주 언급됐고 이에 이인제 전 의원은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라고 TV토론회에서 밝히기도 했다.

또한 선거에서는 주요 후보 모두가 국민통합을 외치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언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편 15대 대선은 3김 정치의 종식을 알림과 동시에 포스트 3김 시대를 예고한 선거로도 거론된다. 그리고 이때 대선에 계수기가 처음 도입됐으며, 황당 후보로 잘 알려진 허경영씨가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비춘 선거기도 했다.

 

16대 대통령선거(노무현 대통령)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16대 대선은 역대 대선 중 가장 드라마틱한 상황이 많았던 선거로 기억되고 있다.

선거 1년 전까지만 해도 ‘차기 대선은 이회창 대 이인제의 싸움이 될 것’이란 여론이 지배적이었고, 월드컵 성공 개최 후로는 정몽준 전 의원이 다크호스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작 대선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노무현 전 대통령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이었다. 대중 인지도와 당내 세력 모두 미약하던 그였으나 사상 첫 국민참여로 이뤄진 경선과 이를 위한 전국 순회 토론회를 거치며 그에 대한 인지도와 지지율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 경선에서 의외 1위에 오르며 소위 말하는 ‘노풍(盧風)’을 타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뉴스포스트DB)

같은 시기 한나라당에서도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이 진행됐는데 이쪽의 경우 압도적 1위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리를 다른 후보들이 전혀 따라잡지 못했고 경선 자체가 싱겁게 마무리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전 초기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전 총리에게 크게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정몽준 전 의원과의 단일화 시도 등을 거치며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선거 전날 있었던 정 전 의원의 지지철회 역시 결과적으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세력 규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회창 전 총리는 이번에도 두 아들의 병역의혹에 휩싸이며 힘든 선거를 치러야 했으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노사모의 공세에도 시달려야 했다.

16대 대선은 이전까지의 지역구도가 세대구도로 변화한 첫 선거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영향 속에 진보진영 후보로 나선 권영길 후보가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낳으며 약 100만표 득표에 성공하기도 했다.

한편 이회창 전 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간발의 차로 패배한 뒤 한나라당에서는 당 차원의 대선 결과 불복 및 재검표를 요구해 실제 재검표가 이뤄지기도 했으나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17대 대통령선거(이명박 대통령)

2007년 12월 19일 치러진 17대 대선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일방적인 결과가 나온 선거였다. 1위와 2위 후보간 표차가 가장 많이 난 선거였고 선거 과정 자체도 대중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선거에서는 역대 가장 치열한 당내 경선을 뚫고 한나라당 후보가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48.7%를 득표하며 비교적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여당 후보로 그를 맞상대한 정동영 의원을 비롯해 대권 3수 도전에 나선 이회창 전 총리와 이인제 전 의원 그리고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모두 이 전 대통령 당선에 별다른 위협이 되진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의 최대 공신으로는 아이러니 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자주 거론됐다. 부동산 정책 등의 실패로 정부 여당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각했고 이에 야당에서는 누가 나서도 당선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뉴스포스트DB)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의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치른 경선이 더 힘겨웠다. 대중 선호도나 지지율에서는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앞섰으나 당원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 전 대통령 지지세가 월등히 높았던 탓이다. 그리고 이때 경선 이후 한나라당은 친이(이후 비박)와 친박간 권력투쟁이 본격화됐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 관련해 주목해 볼 부분은 그 당시 이명박 캠프와 박근혜 캠프에서 양측의 과거 비리 의혹을 상당히 소상하게 까발렸고 그 중 박 전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부적절한 커넥션 의혹도 제기된 바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여당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우 최근의 보수정당과 마찬가지로 대선 직전까지 이렇다 할 유력후보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에 고만고만한 후보 간 경쟁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동영 의원 측의 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정 의원 측에서 BBK 의혹 제기 등 네거티브에만 집중하는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경제공약 중심의 포지티브 홍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7대 대선의 전체 후보 등록자 수는 12명이었는데 이는 19대 대선 후보등록자가 15명을 기록하기 전까지 역대 최다에 해당했다.

또한 군소후보였던 금민 후보는 당시 나이 45세로 역대 최연소 대선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가 하면 황당 후보로 불리던 허경영 후보가 일부 지역에서 1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선거였기도 하다.

한편 이때 선거는 6공화국 출범 후 보수정당 후보가 서울에서 승리한 유일한 선거이기도 했다.

 

18대 대통령선거(박근혜 대통령)

2012년 12월 19일 치러진 18대 대선은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자 부녀대통령이 출현한 선거였다. 또 향후 별다른 정치적 상황 변화가 없다면 12월에 열린 마지막 대선으로도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선거에선는 대권 재수에 나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친노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문재인 전 의원을 맞아 1987년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전체 투표수 중 과반수 이상을 득표하며 당선됐다.

18대 대선에서는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이어 두 번째로 국외부재자와 재외선거인에 대해 재외선거와 함께 사상 최초로 선박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상투표가 시행되기도 했다.

선거에는 총 7명의 후보가 등록했는데 특이하게도 여성은 모두 홀수를 남성은 짝수 번호를 부여 받았다. 역대 처음으로 남성보다 여성후보가 더 많았던 선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뉴스포스트DB)

또한 1·2위 후보가 받은 득표율이 전체의 99.5%에 달하는 등 역대 선거 중 양대 후보가 가장 두드러진 선거이자 기타 후보의 존재감이 미약했던 선거로도 기억되고 있다.

선거전 당시 최대 변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맞서 진행된 문재인·안철수간 단일화였고 그에 따른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정작 선거에서는 보수대통합에 이어 국민대통합을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이 중장년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당선됐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박 전 대통령이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문재인 전 의원을 앞선 선거였다.

또한 18대 대선 최종 투표율은 76%로 80%를 넘어설 것이란 당초 예상치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유권자 전체 수 증가 등의 영향으로 최종 투표자 수 자체는 역대 대선 중 가장 많은 3000만표를 넘었다. 그렇다 보니 당선자인 박 전 대통령은 물론 낙선한 문재인 전 의원의 득표수가 역대 대선 당선인 득표수보다 높게 나오기도 했다.

한편 선거가 끝난 후 민주당 일각에선 전자개표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선결과 불복 및 수개표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정치 및 선거개입 의혹이 선거전후 불거지며 이후 해당 사건 관계자들이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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