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록 전시장에서 만난 최양근씨 "왜곡된 것을 바로답고 진실을 밝히는 시작될 것"

[뉴스포스트=최병춘 기자] 1980년 5월의 광주. 23살 전남대학교 법학과 3학년 청년 대학생은 모교 정문을 나서 금남로를 지나 전남도청까지 발길을 옮겼다. 광주로 모여든 국군은 탱크와 총으로 진압에 나섰고 그들의 군화발에 친구와 이웃이 쓰러졌다. 청년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도 받았다. 참혹했고 고통스러웠다. 억울했다.

그리고 37년이 지났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당시의 기억은 5.18 민주화운동으로 국가적 기념의 대상이 됐고 당시의 정신은 계승의 가치로 남았다.

청년도 우리나이로 60세, 내년이면 환갑을 맞이하는 나이가 됐다. 당시 법학도는 통일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다. 숭실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과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양근씨(북한학 박사)는  5·18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과 5·18구속부상자회 서울과 경기지역 회장을 역임하면서 5·18의 역사를 함께 안고 살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에는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 1층에서 지나가는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그리고 이후 진실규명운동과정의 기록물을 재구성한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고 최씨는 자원해서 해설사로 나섰다.

지난 17일 서울시민청 지하 1층에 마련된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회에서 최양근 박사가 해설사로 자원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사진=최병춘 기자)

활동시간만 교대로 매일 6시간, 적지않은 시간이다. 이날 3일째 전시장을 지킨 최씨는 기자에게 “만사를 재처놓고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시민들에게 37년 전 5월 광주에 대해 더 많이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세월은 많이 지났지만 그날 상처의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체 아물지도 않았다. 최씨는 아직 밝혀야하고 바로잡아야할 진실이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군이 전남도청에서 헬기를 안쐈다고 하는데...그때 내가 있었다. 헬기가 붕붕 뜨더니 총소리가 나더라고”

 

최씨는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에서야 밝혀진 헬기 기관총 사격 사건에 대한 기억이었다.

1980년 5월 광주 전일빌딩에 대한 계엄군 헬기 사격은 신군부의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61항공대 기동헬기가 투입됐고, M-60 기관총 소사(掃射·상하좌우 난사)가 이뤄진 사실이 37년 만에 밝혀졌다.

헬기 기관총 소사 문제는 오랬동안 5·18 미해결 의혹으로 남았던 과제였다. 지난 15일 광주시와 5·18진실규명지원단에 따르면 1980년 5·18 당시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은 도청 진압 작전이 전개된 5월27일 새벽 4시부터 5시30분 사이, 61항공대 202, 203대대 소속 UH-1H수송용 기동헬기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격 사건을 부인해왔던 당시 군의 거짓말이 드러난 셈이다. 하지만 발포명령자 등 미해결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사진=5·18기념재단 제공)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은 의혹은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당시 발포 명령이 가능했던 전두환 당시 보완사령관 등 지휘관들은 일제히 발포 명령 없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발포 명령자를 찾아 처벌하지도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시작된 진실 찾기 움직임은 노태우 정부 시절 열린 ‘광주청문회’에서는 관련자들의 진술 거부와 자료 부족으로 속시원히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김영삼 정부들어 실시된 12·12, 5·18 특별수사에서 12·12 사태를 일으킨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5공 실세 15명이 처벌을 받았지만 핵심 문건인 군부대 이동 상황과 작전 일지, 계엄군수 등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계엄군이 양심 선언을 하고,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까지 설치됐지만 헬기 기관총 사격의 일부 사실을 제외하면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초 발포 명령자, 사망자와 실종자, 행방불명자 수, 암매장 등 핵심 의혹들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감춰진 진실은 드러난 진실마저 왜곡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5·18 역사 왜곡은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날의 아픔이 지금까지 치유되지 않고 있는 큰 이유가 되고 있기도 하다.

 

서울시민청 지하 1층에 마련된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물(사진=최병춘 기자)

“당시 광주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 해주는 사람 없었다”

 

최씨는 “북한군이 침투했다느니 허무맹랑한 주장을 해. 그걸 이유로 날 고문하고 전기의자 않혔지”라며 왜곡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씨의 말처럼 광주의 민주화 항쟁은 언로가 철저하게 차단된 당시 상황에서 ‘폭동’으로 알려졌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 사례 중 하나인 ‘당시 시민군이 발포했다’는 주장이다.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조사 결과, 최초 발포는 5월 21일 0시 계엄군이 광주역 앞에서 했다. 다음 발포도 계엄군이 했는데, 5월 21일 낮 12시쯤 전남대 앞, 오후 1시쯤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였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발포 명령에 대한 진실이 감춰진 상황에서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던 신군부의 논리는 여전히 일각에서 진행중이다.

역사왜곡은 극우 보수 인사와 온라인을 통해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 군 출신 보수 논객 지만원씨는 공개석상에서 여전히 5·18을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또 극우보수 사이트로 유명해진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도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며 광주의 비극을 희화하해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 2013년 5월 이후 3년여간 인터넷과 개인블로그, SNS에 게재된 5·18 비하 글인 가짜 뉴스 등 4000여건이 광주시에 접수됐다.

정치적 목적 등으로 왜곡된 역사는 오랬동안 5·18과 광주 시민은 편견에 가뒀다.

사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붙잡아 둔 모슴. 당시 시위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붙잡아 구타하고 무릎을 꿇린 채 트럭에 싣고 갔다.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최근 ‘5.18.광주 금수저 법을 아십니까?’제목의 전단지가 제작돼 서울 노량진과 주택가 등에 집중적으로 뿌려졌다. 이는 곧 온라인을 통해서도 퍼져나갔다. 탄핵 반대 세력을 중심으로 ‘5·18 유공자 자녀 공무원 시험 싹쓸이’ 주장을 담은 유인물이다. 5.18 유공자 및 자녀들이 국가유공자로서 혜택을 받는 것은 일부 사실이지만 다른 유공자들과 혜택이 동일해 형평성·법적인 문제가 없다. 대부분 악의적 허위사실을 담은 내용이다.

 

아물지 않는 상처, 왜곡과 편견

 

이처럼 근거 없는 적대적 시선에 최씨는 “우리를 금수저라고 한다. 금수저는커녕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계를 걱정해야하는 처지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최씨가 시민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5.18 이후 광주 시민의 생활 환경이었다.

최씨는 “우리를 금수저라고 하는데 광주 유공자 40%가 기초생활수급자다. 우리는 보훈 수당도 받지 않고 있다. 금수저가 나올래야 나올수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금수저는 커녕 도리어 적절한 치유와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회적 편견과 함께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했다고 항변했다.

최씨는 “당시 아픔을 겪은 이들은 대부분 생활도 어렵다”며 “당시 실종자를 포함해 232명, 그 후에 약 500명이 죽었는데 그중에서 100여명이 자살로 죽었다. OECD 최고인 우리나라 자살율이 4%를 넘지 않는데 우리는 20%나 된다. 자살에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최씨는 “기존 국가유공자처럼 곧바로 치료 받고 취업지원 받았으면 우리가 금수저는 아니지만 은수저는 할 수 있었겠지. 기존 직장에서 짤려 자기 돈으로 치료해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나. 얻어터지고 총맞아서 부상당한 몸에 자기 가슴에서 끌어오르는 한을 해소하고 하소연할데 없어 알콜 중독, 우울증 이런걸로 세상 떠난거야”라고 말을 이었다.

최씨는 “이제까지 다치고 고문받고, 이후에는 신원조회에서 짤리고 사회적으로 사실상 격리됐다”며 “우리는 보훈수당도 없다. 금수저는커녕 흙수저 중에 최하다”고 표현했다.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최씨는 “그래도 나 같은 경우는 예외적인 케이스다. 나야 어느정도 먹고사는데 다른사람들은...”이라며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과거의 아픔 만큼이나 지금의 왜곡된 편견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서울시민청 지하 1층에 마련된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회에 지나가는 시민들이 잠시 멈처서서 전시물을 보고 있다.(사진=최병춘 기자)

감지되는 변화, “이제 시작이다”

 

그나마 37년만에 다시 찾아온 5월 18일에는 과거와 다른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오늘 기념식은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고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서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이라면서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오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권교체와 함께 5·18이 안고 있는 과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높아졌다. 분위기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매년 진행되던 5·18 기념 행사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번 ‘5·18 위대한 유산/연대’ 전시회를 진행한 5.18서울기념사업회 장선임 행사팀장은 <뉴스포스트>와 전화통화에서 “과거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규모도 그렇지만 방문자들의 표정이 밝다라는 점이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역사적인 촛불집회는 5.18 정신 계승에 대한 의미도 그 어느때보다 새삼 강조되고 있다. 더 큰 변화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최씨도 기대했다. 하지만 완성이 아닌 시작으로 봤다.

최씨는 “촛불은 최순실 사태는 물론이고 세월호의 아픔과 사회의 불공평함 등 시대에 대한 함성 일수 있다. 촛불에는 5·18 정신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며 “5·18에 대해 왜곡된 것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그 시작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씨는 “5·18이 제시한 이념은 민주·인권·평화·통일이다. 권력에 국민과 약속 지키라고 요구했지만 탱크와 총으로 진압하는 권력에 맞서다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탱크가 오고 총을 쏠 때 죽을지 알면서도 나선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죽어가신 분이 태반이다”라며 다시 한번 그날을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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