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방문

“얘, 처음엔 정말 이런 갑갑한 곳이 있나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겠지만 좀 있어봐라, 왜 진작 이런 곳으로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말이 나올 테니. 그 깍쟁이 같던 영어과 최 선생도 올 땐 울고불고 난리 치더니 떠날 때는 올 때보다 더 진한 눈물 콧물 뿌리며 정 떼기를 어려워했지 뭐니.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얘들은 순수 그 자체다. 서울 애들과는 달라. 여기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다시 음악을 시작하는 거야.”

고교동창 M이었다. K시내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그녀는 서울을 떠나고 싶다는 선경의 전화에 그렇게 K시로 내려올 것을 권했다. 그렇다고 선경이 M이 추천하는 학교의 음악 강사까지 마음에 둔 건 아니었다. 선경의 몸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물론 M은 그것을 알 리 없을 터였다.

“바이올린을 놓은 지가 언젠데, 새삼스럽게 학교는 생각 없다. 내가 잠시 몸담을 집이나 구해주면 모를까.”

4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벽에 걸린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선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M이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특별히 오늘은 자신의 딸들과 함께 오겠다며 쿠키를 부탁했었다. 그때가 언제 적 일이라고. M은 자신의 딸들과 선경의 첫 만남에 하필 선경의 쿠키가 기억된 모양이었다.

“얘, 난 지금껏 네가 만들었던 쿠키만큼 그렇게 식감이 부드럽고 향이 풍부한 쿠키는 먹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M과 함께했던 고교 시절, 미션스쿨이었던 그녀들의 학교에서는 매년 성탄절 학교 근처의 보육원을 방문하게 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들의 반에서는 쿠키를 구워냈던 것이고. 선경은 그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때만큼은 그녀도 M 못지않게 순수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그 같은 쿠키를 절대 기대할 순 없을 것이었다.

졸업 후 쿠키를 만들어 본 적은 없거니와 선경의 상태가 그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처지였다. 생각 역시도 복잡해졌다. ‘M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일곱 살과 다섯 살의 딸이라고 했던가. M은 아이들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것이겠지. 그런 그녀의 남편은 얼마나 세상이 살맛이 날까. 가정적이겠지. 물론 그도 아이들 어릴 적 제 앞가슴에 어린 그들을 품고 다녔을 테고.’ 반죽을 오븐에 넣는 중에도 선경은 몇 번이나 창문 너머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비 그친 골목으로 강아지를 안은 어린 소녀와 그 맞은편 슈퍼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났다. 길 건너 이층집 난간엔 활짝 핀 연보라의 나팔꽃이 남미의 여름 풍경처럼 싱그러웠다. 선경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서둘러 나머지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그리고 약 20분쯤이 지나 바삭하게 구워진 쿠키를 오븐에서 꺼내려는 즈음 창 아래에서 M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선경아, 우리 왔어!”

생각대로 봄빛에 갓 피어난 앵두꽃처럼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콩 꼬투리 안에 든 앙증맞은 완두콩 같기도 했다. 헉, 그런데 웬 이런 일. 선경은 급히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두 녀석 중 M의 손을 잡고 있는 건빵바지 계집아이. 그 아이가 작은 아이를 뒤에 두고 M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연신 불안한 몸짓으로 계단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선경은 그 아이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아라는 사실에 아연했다. M의 딸이 장애라니. 선경은 꿈에도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M과 선경의 오랜 친구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떨어져 산 세월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음악계의 떠오르는 샛별 차선경, 정신착란증에 무대 위의 나체쇼.’ 7년 전 그일 이후로 선경은 M뿐만이 아니라 모든 친구와도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이라서. 고교 단짝이었던 M을 찾게 된 것도 최근 수혁과의 그 일이 있고 나서였다. 그러니 M이 자신의 가정사를 선경에 시시콜콜 말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선경이 자신의 큰딸에 당황하는 것을 알았는지 M은 평소 같지 않게 호들갑이었다.

“어머! 냄새 좋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냄새니? 맛도 옛날 그대로겠지? 왜 그렇게 서 있니? 우리 이쁜 공주님들이 왔으면 빨리 알아 모셔야지 호호호. 얘는 작은딸 로사, 그리고 우리 큰딸 보나.”

M이 그렇게 활짝 웃는데도 선경은 자신의 커피 잔에 설탕을 세 스푼이나 퍼 넣고도 그런 자신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이었다. 사실 그것이 M의 큰딸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그것, 어쩌면 그건 자신의 딸들을 바라보는 M의 눈빛 때문인지도 몰랐다. ‘봐라,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쁘니. 내겐 세상에서 이 아이들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건 없단다. 내 피와 살을 나눈 내 딸들. 이렇게 소중한 생명을 넌 그깟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 지워내고 말다니,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내 앞에 하얀 웃음을 보이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 M은 마치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물론 M이 선경의 비밀을 알 리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선경은 M의 시선을 피하느라 자꾸만 찻잔에 헛손질이었다. 선경의 그런 모습에 M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서둘러 일어섰다.

“오늘은 가야 할 데가 있거든.”

“아직, 쿠키접시도 비우지 않았는데…….”

“앞으로 종종 들릴 텐데 뭐, 아참, 혹시 너 시간 괜찮으면 우리랑 가지 않을래?”

사전에 전혀 예고 없던 뜻밖의 제안이었다.

“나랑? 어딜?”

“가보면 알아, 바람도 쐴 겸, 또 네게 할 말이 있기도 하고.”

“할 말? 지금 하면 안 되고?”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은 선경은 울상으로 도리질을 쳤다. 그러나 M은 집요했다.

“기집애, 모처럼 드라이브 한번 하자는데 튕기기는, 자 얼른 일어나.”

M은 떠밀리지 않으려는 선경을 억지로 문밖에 옮겨놓더니 그 손에 아이들 손을 쥐어주었다. 그러니 선경이 더는 거절할 틈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대로 M의 차에 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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