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국을 품은 곳

[뉴스포스트=선초롱 기자] 6.25 전쟁 67주년을 맞아 <뉴스포스트>에서는 호국보훈의 상징이자 전쟁의 상흔과 애국애족 정신이 함께 깃들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역대 대통령 네 분의 묘소가 자리한 탓에 과거 보수와 진보 진영 내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소처럼 비춰 지기도 했으나, 기자가 직접 찾은 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통합의 장소였다.

국립서울현충원 중앙묘역 (사진=선초롱 기자)

국립서울현충원은 지난 1954년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에 연면적 43만평 규모로 건립된 국가묘역으로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는 국립천안현충원과 달리 국방부에서 그 관리를 맡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구한말 의병장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우국지사는 물론 6.25 전쟁과 월남전 당시 순국한 수많은 순국선열의 묘역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고(故) 이승만·박정희·김대중·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 네 분의 묘역이 조성돼 있으며, 경찰 순국자의 묘역도 따로 마련이 돼 있다.

이곳에 모셔진 전체 호국영령은 총 14만여 명으로 이 중 12만여 명은 6·25 참전용사들이다. 그렇다보니 현충일인 6월 6일이면 약 20만 명의 시민들이 참배를 위해 이곳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시 동작구에 국립서울현충원이 만들어진 계기는 6·25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방부는 남측에서 활동하던 좌익세력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국군 사망자가 나오자 이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했고 추가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군인묘지 건립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며 이를 잠시 중단했다.

전쟁 중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망한 전몰장병들의 영현을 부산 근정사와 범어사 내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에 모셨으며 이는 육군병참단에서 관리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새로운 군인묘역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군은 후보지 물색에 나섰고, 1952년 육군뿐 아니라 3군 전몰장병을 모두 안치할 수 있는 묘역 조성이 추진됐다.

당시 정부는 새로운 군인묘역의 명칭을 국군묘지로 정했고, 1953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현 부지인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했다.

1954년 3월 군은 묘역 정지공사에 들어갔고 3년에 걸쳐 238.017㎡의 묘역을 조성했다. 이 후 현충원은 광장 99.174㎡, 임야 912.400㎡ 및 공원행정지역 178.513㎡를 추가로 조성해 현재 모습을 갖췄다.

또한 군에서는 1955년 7월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를 발족했고, 1956년 4월 군묘지령 제정을 근거로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까지 완성했다. 이후 현충원에는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및 군무원이 안장됐고 더불어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에 대해서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명칭은 2005년 제정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것으로, 해당 법률에 근거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서울현충원은 도심 속에 자리 잡은 공원형 묘역이다 보니 평일에도 참배객들이 많은 편으로, 동작구 지역 주민들에게는 일상의 휴식처로도 애용되고 있다.

 

세대가 공존하는 장소

호국의 달인 6월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31일 오후 찾아간 국립서울현충원은 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에 평소에 비해선 참배객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날 현충원에는 보훈의 달을 맞아 미리 이곳을 찾은 여러 분류의 참배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정문을 지나 자리한 만남의 장소 인근 공터에서는 현충원 견학을 온 어린이집 학생들과 지도 선생님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현충원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늘 아래서 자유로이 뛰노는 어린 참배객들의 모습 속에선 조금은 색다른 생동감이 전해져 왔다.

현충문 앞 현충탑 앞에서는 단체 관람객들의 단체 분향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들을 맞이하게 위해 도열한 현충원 소속 의장대의 의장시범이 펼쳐졌다. (사진=선초롱 기자)

겨레얼마당을 지나 마주한 현충문 앞 현충탑에서는 단체 관람객들의 단체 분향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현충원 소속 의장대의 의장시범이 펼쳐졌다.

현충탑 뒤편에 본격적으로 조성돼 있는 중앙묘역에서는 길게 늘어선 묘지석들이 끝 모를 장엄함과 숭고함을 전해주며, 이곳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들을 모셔진 현충원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중앙묘역 오른편에 조성돼 있는 경찰 묘역에서는 묘역 정비 봉사 중이던 서울 동작경찰서 소속 경찰들로 이뤄진 청렴 동아리 회원들도 만날 수 있었다.

매달 한 번씩 대외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청렴 동아리 소속 경관에게 현충원이 가지는 의미를 묻자 그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소”라고 답했다.

서울 동작경찰서 소속 경찰들로 이뤄진 청렴 동아리 회원들이 경찰 묘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선초롱 기자)

경찰묘역을 지나자 무명용사 위령탑이 눈에 들어왔고, 그 너머로는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묘역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현창 교육차 현충원을 찾아온 십여 명의 고등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은 선생님께 현충원에 묻히신 애국선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뒤 한 애국선열의 묘역에 헌화와 참배를 했다.

그런가하면 월남전 참전용사 묘역에서는 백발의 나이 지극하신 노령의 참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 묵념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울컥해지는 마음 때문인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또한 충혼탑 뒤 납골당에서는 한 순국선열의 분향식이 열리고 있었고 검은색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인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 한 애국선열의 묘역에 헌화와 참배를 하고잇다. (사진=선초롱 기자)

역대 대통령 묘역, 참배객 끊이지 않아

현충원 내 가장 유명한 장소로는 정치인들도 즐겨 찾는 역대 대통령 네 분의 묘역이 손꼽힌다. 그리고 이날 역시 이들 대통령 묘역에는 다른 곳과 비교해 참배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중 장군묘역 건너편 현충원 내 가장 높은 곳에 마련돼 있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묘역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도 불구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군복을 입고 박 대통령 묘역을 찾은 한 재향군인은 참배를 끝내고 난 뒤 “내가 살아생전 언제 다시 이곳을 와보겠냐”며 함께 온 지인들과 함께 박 대통령 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묘역을 지나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김대중 대통령 묘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생전 박 대통령과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고 지금도 자주 비교 대상에 오르는 두 분의 전직 대통령 묘역이 역대 대통령 묘역 중 가장 인접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여전히 김대중 대통령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참배 모습이 눈에 띄었다. 또한 김 대통령 묘역에는 최근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에 오른 동교동계 출신 정치인 박주선 국회부의장의 헌화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 김 대통령 묘지 관리인은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지금도 매주 화요일이면 이곳을 찾아 참배를 하고 간다”고 귀띔해줬다.

김 대통령 묘역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자 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를 탓인지 이 대통령의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의 수가 앞서 찾은 두 전직 대통령 묘역에 비해 다소 적어 보였으나, 이곳에서도 그를 추억하는 이들의 헌화와 참배 행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지난 2015년 현충원에 안치된 김영삼 대통령 묘역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묘역은 다른 역대 대통령 묘역에 비해 길가가 아닌 언덕에 자리해 있어, 참배객들이 찾는데 다소 어려움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도 김영삼 대통령을 추모하는 참배객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역대 대통령 네 분의 묘역. 왼쪽 위부터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사진=선초롱 기자)

앞서 정치권에선 어느 누구 관직에 오르거나 선거에 출마하게 되면 현충원부터 찾는 퍼포먼스를 자주 보여줬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누가 어느 대통령 묘역을 참배 했네 안 했네” 하는 이유로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본인들의 정치적 성향 내지 소속 정당의 이념 편향성 때문에 선별적 참배가 자주 이뤄졌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현충원은 우리 사회를 둘로 쪼개놓은 보수와 진보진영 간 갈등의 한 단면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반면 기자가 찾은 현충원의 모습은 세간의 평가와는 사뭇 달랐다. 전우의 묘를 찾아 눈물을 닦는 어느 노병의 모습과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단체 참배에 나선 10대 학생들의 순수한 묵념에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 묘역에서도 저마다의 이유로 그들을 추모하는 다양한 유형의 참배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우리 사회 갈등의 장이 아니라 국가 보훈의 상징이자 세대가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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