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드레스의 저주는 풀리고

20분쯤을 더 달려 M은 차를 세웠다. 해안가를 벗어나 완만한 곡선의 산 중턱이었다. 성모원의 낮은 담장 너머로 샛노란 해바라기들이 태양에 구애라도 하듯 해를 향해 바짝 목을 세우고 있었다.

선경은 애써 그것들을 피해 멀리 시선을 두었다. 보나의 손을 잡아 차에서 내리던 M이 잠깐 둘러보기만 하라는 말에도 선경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M의 손에 이끌려가던 두 아이 역시 몇 번이나 선경을 돌아보았지만, 선경은 질끈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놓은 모양이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요란하다는 것은 제대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닌 제멋대로라는 뜻이었다. 현(鉉)을 제대로 긋지 못하고 있었다. 신입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바흐의 미뉴에트를 저렇게 엉망으로 그어대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튜닝도 제대로 되지 않아 음이 엉망이었다. 활을 쓰는 손목이 굳어있는 것도 문제였다. 활 털을 유연하게 밀착시키지 못해 떨림이 심했다.

악보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서 샾과 플랫 역시 무시되고 있었다. 선경은 보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러나 선경이 문 쪽으로 몇 걸음 떼려는 순간 그 소리는 뚝 끊겼다. 누군가 들어와 녀석의 뻣뻣한 손목을 바로 잡는 모양이었다. 선경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푸른색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자 장난이라도 치듯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조금 전과 달리 정확하게 음계에 따라 미끄러지는 소리였다. 마치 바람이 물결 위를 날 듯 부드럽고도 날렵하게. 그러다 점점 음폭을 키워 빠르고 강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도 선경은 발끝을 세워 소리가 나는 창문 아래로 다가섰다. 생각보다 어린 여자아이 뒷모습이었다.

상당히 낯이 익은 모습이기도 했다. 헉, 놀랍게도 보나였다. 아니, 그 아이라고 생각한 순간 종잇장이 구겨지듯 아이의 얼굴이 뭉뚱그려져 코와 눈, 그리고 입이 사라졌다. 밋밋한 얼굴. 그것은 마치 자궁 안에 든 태아 같기도 했다. 바로 그 얼굴이 선경을 향해 허공을 날 듯 빠르게 다가왔다. 으악~

꿈이었다. M을 따라 성모원을 다녀온 그 날 이후, 두 번째 꾸는 꿈이었다. 그것에 잠은 이미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왜, 그런 꿈을 연거푸 꾸는 것인지. 아직 창밖은 어둠이었다. 그래도 다시 잠들기는 어려웠다. 잠이 사라진 멍한 머릿속으로 조막만 한 얼굴이 밀고 들어왔다. 조금 전 꿈에서 봤던 얼굴. 그날 차 안에서처럼 잔뜩 긴장된 표정 그대로였다.

‘넌 다시 일어설 수 있어,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M의 목소리였다. 그 뒤를 이어 또 하나의 목소리. ‘그분께서 주신 달란트를 아이들에게…….’ 선경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다고 생각이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선경은 자리를 털고 베란다를 향했다.

희붐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맞은편 성당의 불빛에 이사 온 그대로 포장을 뜯지 않은 상자의 윤곽이 선명했다. 선경은 망설였다. 그 같은 망설임은 벌써 여러 번째였다.

선경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상자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상자 안에 반짝이는 몸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경의 바이올린이었다. 방금 연주를 마치고 숨을 가라앉히는 그것처럼 화려하고도 도도한 바이올린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선경은 그것을 선뜻 집어 들지 못했다.

연주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벌떡거려 죽을 것만 같던 바이올린. 선경은 손가락 끝을 세워 바이올린의 몸통을 조심스럽게 타 내려갔다. 힘겨루기 상대를 타진하듯 조용하고 민첩하게, 그러다 잽싸게 바이올린의 목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선경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내리찧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힘을 잃은 것이었다. 예상대로 붉은 드레스의 저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었다. 선경은 엉덩이를 붙인 자세로 베란다 정면의 홈통 벽면을 노려봤다.

그곳 구석에 몸을 지탱한다면 어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선경은 바이올린의 목을 틀어쥐고 빨래 건조대가 있는 구석을 향해 엉덩이를 끌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세워 그곳의 모서리에 몸을 기댔다. 생각대로 몸이 조금은 안정적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선경은 재빨리 바이올린을 목에 끼고 활을 내려 그었다. 마른 피부가 긁히듯 지극히 탄력 없는 신음 소리였다. 그것에도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번엔 손목을 세워 활을 부드럽게 밀어 올렸다. 젠장, 손목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활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온몸이 경련이었다.

아아, 선경은 바이올린을 집어 던질 태세였다. 그때였다. 선경의 눈에 비친 그림자. 베란다 창문에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그림자. 그것은 창문에 투영된 선경이 아니었다. 2층 어두운 허공을 딛고 선 그림자. 놀랍게도 그건 아까 꿈속의 그 아이였다.

언제부터 그 아이가 선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지 그 아이가 마치 앞이 보이기라도 하듯이 선경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의 모습이 선경의 눈에 비친 그 순간, 선경의 목까지 차오르던 심장의 발딱거림은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그것에 뒤틀리던 몸도 서서히 균형점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딛고 선 다리의 후들거림도 더는 아니었다. 선경은 눌린 용수철의 반격처럼 힘차게 팔을 움직여 현을 내리쳤다. 아~ 막힌 숨이 터지는 강렬한 선율이 창을 흔들었다.

또 한 번 활대를 들어 올리자 풀잎에 도르르 구르는 이슬의 청아함이 어둠을 갈랐다. 이어 소리는 물 위를 사뿐히 걷는 물방개의 가벼움으로 통통 튀어 올랐다. 마침내 붉은 드레스의 저주가 풀려나는 소리였다. 어느새 창밖으로 태양이 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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