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0층 이상 고층 건물만 3천2백여 개, 고층 건물 화재는 지난해 150건에 달해

[뉴스포스트=박은미 기자]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에 거주하는 양모(49)씨는 일년에 한번 실시하는 화재대피 훈련이 너무 귀찮다. 화재 경보가 울리면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가야하기 때문이다. 물에 적신 담요나 수건 등으로 몸과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숙여 이동하라고 안내받았지만 지키지 않고 대충대충 걸어 올라간다.

안전요원이 소화기와 응급환자용 의료기기가 설치된 장소 등을 설명해 주지만 이마저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40분여의 시간이 흘러 지정된 피난장소에 사람들이 다 모여 대피상황을 파악되자 드디어 훈련이 끝났다. 하지만 이동을 하며 본의 아니게 낯선 사람들과 마주친 기분이 들어 영 찝찝하다. 양 씨는 아파트 관리실에 이런 걸 꼭 해야 하냐고 민원을 넣어 보지만 '원래는 일년에 두 번 해야 하는데 줄여서 한번만 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머쓱해진다.

 

(사진=뉴스포스트DB)

제도 강화돼도 안전의식은 제자리..."대피훈련, 꼭 해야되나요?"

지난달 8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영국 런던의 '그렌펠 타워' 화재 참사는 '예고된 인재'였다. 가연성 재질로 만든 외장재 탓에 불길이 위나 옆 건물로 빠르게 확산되며 피해를 키웠다.

뿐만 아니다. 최초 화재 발생 가구에서 초기소화가 없었고 화재경보기 또한 작동되지 않았다. 기본 소화설비인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았으며 연기와 불길을 막기 위해 닫아 놔야하는 방화문은 모두 열려있었다. 건물의 유일한 탈출구인 승강계단은 하나뿐이었지만 책상 등으로 막혀 있어 시간이 지연됐으며 화재 대피 훈련 경험이 없다보니 계단을 통한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1974년 준공된 노후 아파트인 크렌펠 타워는 불과 1시간 만에 모두 타버렸다.

우리나라의 사정을 살펴보니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국내 30층 이상 고층 건물은 3천2백여 개로 10년 새 11배 늘었다. 고층 건물 화재는 2016년만 150건에 달하며, 지난 2월 4명이 목숨을 잃는 등 5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 화성시 '동탄 메타폴리스' 상가도 66층이었다.

하지만 이런 화재에 대한 예방안은 초고층 건물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앙소방학교 권혁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우리나라는 건물의 초고층화 추세로, 화재 발생 시 대형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권 교수는 "소방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건물 화재를 완벽하게 방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설계단계부터 체계적인 소방안전대책을 반영해야 하고, 건물 소방시설의 점검·보수·유지관리와 유사시 대비 피난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변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법제도가 아무리 변화한들 국민들 의식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어렵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공사를 맡은 건축가와 소방작업을 하는 관리자, 심지어 고층건물에 머무르는 입주민들까지 안전에 대한 마인드가 잘못돼 있다"며 "건축가는 시공시기와 단가 감축이 우선이며 관리자들은 주민편의 우선으로 생각하니 제대로 된 안전관리가 될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례로 외국의 초고층 건물의 경우 출입문에 피난 유도 표시를 따로 해놓는데, 우리나라는 주상복합에 사는 부유층들이 미관상 꺼리는 부분이 많아 그런 표시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덧붙였다.

현행 소방안전관리 법령에 따르면 50층 이상 주상복합 건물일 경우 안전관리등급이 특급·1급·2급·3급으로 나뉜다. 지난해까지 아파트는 2급 소방안전관리대상물로 분류돼 왔지만 층수나 높이 등에 따라 등급이 특급, 1급으로 기준이 강화됐다. 50층 이상이거나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200m 이상인 아파트는 '특급'으로, 30층 이상이거나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20m 이상일 경우 1급 소방안전관리 대상물로 분류된다. 

문제는 특급의 경우 매년 두번 화재피난훈련을 실시해야 하지만 입주민들의 저조한 참여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올해 고층 아파트의 소방안전관리 등급이 높아지고,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가 보다 확대되는 등 법적제도는 강화되고 있지만 국민들의 의식 변화가 따라주지 못하는 상태"며 "주상복합의 경우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입주민들이 훈련을 반기기는커녕 불평섞인 민원을 제기해 건물 관리자들이 눈치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화재에 취약한 고층에 사는 주민들이 대피 훈련 먼저 요구해야 함에도 오히려 반대하기 때문에 훈련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거나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것. 심지어 일부 주상복합는 입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시설방재 팀이 자체적으로 소방 훈련을 하고 이에 대한 결과만 주민에게 보고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6월 국민안전처가 인천의 한 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서 가상 화재훈련이 실시한 결과 대피는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아파트 안의 화재 피난처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권 교수는 "'설마 내게 그런 일이 닥치 겠어'라는 안일한 의식이 모든 대형 참사의 원인이다"며 "우리 주위에 만연한 '설마'하는 안전불감증이 결국 엄청난 참사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봐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의식을 생각하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안전불감증이 심각하다"고 우려했다.

 

(사진=박은미 기자)

국내 고층 건물은 안전한가

'그렌펠 타워' 화재 직후 영국 정부는 참사를 키운 원인인 '가연성 외장재' 문제를 경고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건축제를 사용한 600개 고층 건물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우리 정부도 '그렌펠 타워' 화재 참사를 계기로 국민적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초고층건물을 대상으로 긴급 안전점검을 벌였다.

국민안전처는 6월 19일부터 이달 7일까지 3주간 중앙특별조사단을 구성해 국내 50층 이상 건물 10곳에 대한 긴급 안전점검을 벌인 결과 총 100건의 위법사항을 발견해 시정 조치했다고 18일 밝혔다.

시정 조치 종류는 과태료 5건, 조치명령 61건, 기관통보 9건, 현지 시정 25건이다.

과태료를 받은 경우는 방화문 등 피난 방화시설 유지관리 불량(4건), 소방시설 유지관리 불량(1건) 때문이었다.

일정 기간 내 불량사항을 개선해야 하는 조치명령으로는 피난구 유도등 점등 불량이 11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스프링클러설비 헤드, 자동화재탐지설비 감지기 불량이 각 6건, 휴대용 비상조명등 불량 5건, 완강기 표지 미비 2건, 기타 31건이었다.

관할 시·군·구 기관통보는 총 9건으로, 건축물 확장 부분 불법 사용 1건, 헬리포트 'H'표지 라인 도색 불량 1건, 헬리포트 헬기유도등 점등 불량 2건 등이 지적됐다.

가스 분야에서는 가스누출 차단장치 불량·가스 소량 누출 각 1건으로 파악됐다.

나머지 25건은 현장에서 모두 시정조치가 완료됐다고 안전처는 밝혔다.

안전처는 지난 11일 긴급 안전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전문가 워크숍을 개최하고 초고층 건물의 위험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맞춤형 해결책을 모색했다.

워크숍에서는 운영·관리상 문제점으로 ▲ 업무량 대비 안전관리인력 배치 부족 ▲ 안전관리자 타업무 겸직에 따른 전문성 확보 곤란이 지적됐다.

법·제도 미흡 사항으로는 ▲ 안전관리자 권한 대비 과도한 책임 ▲ 건물 관리회사와 안전관리자의 잦은 변경에 따른 현장 상황파악 부족 등이 꼽혔다.

전문가들은 워크숍에서 건축 준공을 위한 공사완료 기준을 소방준공검사와 동일하게 적용하고, 2개 이상의 계단 설치 시 양방향 피난이 가능하도록 상호 '이격거리'를 두도록 법제화하며, 자동방화 셔터의 무분별 남용을 제한하는 방안 등을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또, 특급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요건 강화, 소방안전관리자 겸직 금지, 소방시설용 수원확보를 위한 동별 옥상수조 설치 등도 소방 제도개선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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