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가 대학 2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날 밤. k시에 내리자 시내는 벌써 한밤중이었다. 그래도 그 밤에 환이를 만나야만 했다. 며칠 전 환이의 입영통지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환이의 하숙집 근처에 가 전화로 불러내면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처음으로 내가 환이의 하숙집을 찾았던 날이기도 했다. 그가 일러주었던 골목에서 어렵지 않게 파란 대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골목 끝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도 찾기 쉬웠다. 바로 하숙집 맞은편에 있었다. 그런데 전화박스에 들어가 동전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난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맞은편 파란대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의 안다시피 한 남녀가 나왔던 것이다. 한눈에도 그들이 지영이와 환이라는 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감추었다.

하지만 내 움직임보다 더 빨리 환이가 붙들고 있던 지영을 밀치고 황급히 자신의 몸을 떼어냈다.

몸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전화박스를 박차고 뛰었다. 골목을 빠져 어딘지 모를 모퉁이에 기대섰을 때 숨이 턱에 닿은 환이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오, 오해야!”

숨을 헐떡이는 그에게서 여전히 솔향기가 났다. 가슴이 아렸다.

“뭐가?”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더는 입 떼지 마!”

놀람과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정말이야, 내가 없는 사이에 지영이 혼자서 내 방에 들어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 돌려보내고 있던 참이었어.”

날벌레들의 군무가 요란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입 떼지 말라고 했지! 입 떼지 마.”

“정말이야!”

“정말이라고? 사실이라고? 좋아,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게 분명한 선을 그을 줄 모르는 너 같은 인간은 나도 이제 싫증이 난다.”

그리고 그 길로 어둠속을 걸어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날 밤 이후 환은 몇 번이나 날 찾아왔지만 난 그를 만나지 않았다. 비참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많은 것을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도 여태 지영을 만만하게 봤던 내 자만심이 문제였다. 뭐든 눈독을 들이면 포기할 줄 모르는 지영의 성격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지금껏 지영이 환이를 향한 눈길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으면서. 아니, 난 솔직히 환이 쪽에서 처리해주길 기대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잘못은 나보다 환이가 더 컸다.

어쩜 환이는 양손에 빵을 들고 저울질 했던 건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에 모아지자 더는 미련 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깟 겉멋만 잔뜩 들어 저 밖에 모르는 그런 계집애를 나와 견주다니. 자존심 회복은 빠를수록 좋은 것이었다. 곧바로 환이를 만났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우린 그냥 친구였어, 한 번도 우린 서로에게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말 한적 없었으니, 그러니 그날 밤 일을 가지고 내게 사과할 건 없어, 오히려 착각한 내가 잘못인 것 같으니, 그래서 이제 난 니들 사이에서 빠지기로 했어.”

구겨질 대로 구겨진 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애써 쿨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젠장, 그런데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환이 역시도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낮았다.

“미안해, 네가 화를 내는 것 충분히 이해해.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숨길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눈빛이라고 했어, 그건 말로 설명하고 말로 확인해야 아는 건 아니라고, 우린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거였어. 우린 말이 필요치 않았다고.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제발 그런 식으론 말 하지 말자.”

“그래! 그래서 지영이에게도 그렇게 각별한 거였니?”

빌어먹을, 쿨하고 싶었는데 난 어느새 질척이고 말았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어, 걔 원래 장난이 심했잖아 그러다보니....”

그가 곤혹스러운 듯 긴 한숨으로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 새 여름이 가는지 물기를 잃어가는 나뭇잎 한 장이 그런 그의 어깨위로 하르륵 떨어져 내렸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은 나를 더 우습게 만드는 거야, 지금 그 어떤 말도 내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아니, 누가 뭐래도 지금껏 지영은 진심이었어. 그런데 그걸 몰랐다고? 장난이었다고?” 난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 그랬다고 치자, 솔직히 나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어. 아주 잠깐이었다고.”

아아, 가슴에서 뭔가가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깟 지영이 그 계집애한테 흔들렸다니, 나와 저울질 한 게 사실이라니. 젠장.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 그는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돌아섰다.

“너, 이대로 가면 우린 끝이야, 너 정말 자신 있니? 나 담주면 군에 입대해 이대로 너랑 끝내고 싶지 않다고! 난 너 없으면 안 된다고!”

그가 다급하게 내 어깨를 돌려 세웠다. 하지만 난 파랗게 냉소를 지은 채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가 내 독기어린 눈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등 뒤로 멀어져 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 쓸쓸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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